<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는 현대인의 삶, 아니 우리 인생의 본질을 꿰뜷어 본 지혜라든지,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의 허상을 좇을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갈 줄 아는 것이 너무도 필요하다는 저자의 혜안(慧眼)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최근 잇다라 일어나고 있는 연예인 등 유명한 사람들의 자살 소동은 어쩌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가지 못하는 데'기인하지 않나 진단하는 필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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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마신 진한 커피 때문인 줄 알았다. 자꾸 잠이 깬다. 아니다. 최진실 때문이다. TV를 켜기만 하면 그녀는 항상 있었다. 하나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없다. 찬란한 가을 연휴 내내 사람들은 그녀의 슬픈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벗어야 믿겠습니까?' 노련한 나훈아는 그때 그랬다. 풀어헤친 허리띠를 움켜쥐고, 눈을 부릅뜨고 대중들에게 외쳤다. 아, 그러나 그 순간에도 '예' 하고 대답하는, 정말 지겹게 집요한 이들도 있었다.
대중과 스타의 관계는 그렇다. 스타는 대중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대중은 그 스타의 이야기를 소비한다. 나훈아 괴담은 그 절정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스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자, 대중은 그 스타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글래머의 젊은 여배우들을 등장시키고, 야쿠자의 복수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마무리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미디어를 통해 소비해왔던 익숙한 3류 스토리텔링이다. 그 절정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나훈아는 식탁 위에 뛰어올라 허리춤을 잡고 외친 것이다. 극적 반전이다.
안타깝게도 최진실은 달랐다. 카메라 앞에서 한 번도 눈을 부릅떠 본 적이 없다. 즐거워 어쩔 줄 모르거나 하염없이 우는 연기가 그녀의 전부였다. 대중이 만들어내는 황당한 스토리텔링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식의 대본은 한 번도 연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절망한 그녀는 대중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충격적인 방법으로 이야기를 끝내 버렸다.
어디까지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도무지 구분이 쉽지 않은 오늘날이다. 삶의 방식이 달라지자 존재확인 또한 이전 방식으로는 불가능해졌다. 아이덴티티의 위기다. 그 틈새로 새로운 존재확인 방식이 자리잡는다. '이야기'다. 사람들은 온갖 방식의 매체를 동원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존재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통해 확인되고, 내가 하는 이야기가 곧 '나'인 것이다.
결정적인 문제가 생겼다.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내 이야기'가 없다. 내 존재를 채워줄 내 이야기, 즉 내 삶의 가치와 의미 부여의 과정이 생략돼 버린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이들은 타인의 이야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온갖 미디어를 통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스토리텔링과 자신의 이야기를 맞바꾼다. 기쁨, 슬픔과 같은 자신의 심장으로 느껴야 하는 정서적 경험조차 미디어에서 정해준 방식으로 느낄 뿐이다. 시청률, 혹은 방문자 횟수가 곧 자본인 미디어는 갈수록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쏟아낸다.
악플을 막는 법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이야기를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우리들은 또 다른 스타들의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에 관한 이야기, 정치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빼고는 도무지 할 이야기가 없는 우리에게 최진실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다. 보다 자극적인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 일상의 기쁨,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아내와 아이들의 이야기, 잊고 지냈던 부모, 친구들의 가슴에 담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이와 울고 웃으며 서로의 정서를 공유하는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내 진정한 존재는 확인되기 때문이다. 내 삶의 대본은 내 이야기다. 최진실의 끝없는 절망이야기가 아니다. 나훈아의 야쿠자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김정운 교수(명지대 문화심리학)(조선일보 2008.10.8자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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