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먹어도 개와는 안 먹는다

내가 만난 미국사람들

석전碩田,제임스 2008. 8. 9. 18:27

상 어디엘 가나 좋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또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내가 만난 미국인들 중에 그들의 친절이나 사는 모습을 잊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1972년 처음 유학을 간 seattle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지도교수로 만난 분은 50대 초반의 Dr.Jack Kittel 이었다. 처음 만나 나의 엉터리 영어에서 내가 겪을 모든 어려움을 다 예견하시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의사를 확인해 가며 나의 학업 계획을 적절히 짜 주셨다. 그리고 언제나 문제가 있으면 들리라고 하셨다. 실제로 그렇게 하며 학교생활을 하였다.

 

독신자의 유학생활 중 불편한 것은 긴 휴가철이다. 추수 감사절, 성탄절, 부활절 둥의 기간에는 학교의 급식 시설은 물론 일반식당도 문을 닫으니 기숙사 생활자의 형편은 딱하기 마련이다. 한데, 나의 지도교수 Dr. Kittel은 이런 때에 꼭 나를 데리고 오셔선 차에 태우고 그 분의 댁에 데리고 가셨다. 모든게 황공할 뿐이었다. 차로 데리러 오시는것, 가정내의 파티에 나를 참석시키시고 마치 주인공처럼 대우해 주시는 것, 처음 먹어보는 음식, 마셔보는 술 따위는 지금 생각해도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수술을 받고 퇴원하고 목발 짚고 겨우 걷는 성탄절에도 변함없이 나를 찾아오셨다. 학생아파트 8층에서 나를 데리고 내려가시고 차에 싣고(!), 목발을 트렁크에 넣고 날 위로하시며 집에 가서의 칙사같은 대우 . . . 그러기를 몇 차례 지났다.

 

어느 추수 감사절이었다. 또 똑같은 행사가 이루어졌다. 유쾌하고 감격한 나를 나의 아파트 실어다 주신 내 교수님이 어쩌면 다음 성탄절엔 자네를 초청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하시며 평화로운 웃음을 남기고 가셨다. 나는 그저 당연히 어디 여행을 가시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무심하게 여겼다. 성탄절이 되었다. 신문 사망기사난에 Dr. Kittel 의 사망기사가 나고 혹 의사가 있으면 조위금은 대학병원 암 센터에 보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럴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장레식장엘 참석하였다. 사모님 말씀, “이제는 왜 성탄절엔 초청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얘길 이해하겠느냐?” 였다.

 

첫 학기 공부는 너무 어려웠다. 교수의 강의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말할것도 없고 읽어야 될 양이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찼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식으로 노트라도 할수 있음 좋겠는데 알아듣지 못하니 노트는 물론 작성할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남학생에게 노트를 좀 빌리쟀더니 “No.” 였다. 궁리 끝에 담당교수를 찾아갔다. 사정을 얘기하고 (얘기라야 말이 된 건 아니고 그 교수가 짐작했을 것이다) 도움을 구했다. 그 교수가 강의 시간에 내 얘길하고 누군가 노트를 좀 빌려주라고 광고를 해 주었다. 어느 여학생 (뚱뚱하고 안경 쓴 여학생이었다) 이 기꺼이 빌려주겠노라고 하였다. 먼저 그 학교에 유학와 있던 고등학교 선배가 있었다. 나의 고충을 얘기했더니 그는 뚱뚱하고 안경 낀 여학생을 찾아 도움을 청하라.” 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안경 끼고 뚱뚱한 학생은 호리호리하고 안경 안낀 여학생과 단짝이었다. 그들이 각각의 노트를 복사 (그때 한국엔 복사기가 없었다) 해 주었다. 둘의 노트를 종합하고 대충 책 내용과 맞춰 공부하니 한결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과목 첫 시험에서 12명중 11등을 하였다).

 

안경 안 끼고 호리호리한 여학생 남편은 심리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학생이었다. 그 친구가 David Ellingson인데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는데 지금은 연락이 안 된다. 어쨌거나 David은 내 형편을 전해 듣고는 나를 찾아 와 필요하면 언제나 도움을 청하라고 하였다. 어느 과목이었던가 페이퍼(paper)' 가 과제 였는데 페이퍼가 뭔지도 모르는 지경의 나로서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미국에서 David은 일주에 적어도 한 번은 나의 과제를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늘 용기를 주었다. 어느날 내가 용기를 주어서 고맙다.”고 했더니 그 용기는 내가 주는 게 아니고 네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철학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있는 곳을 수소문 하고 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한쪽다리가 거의 으스러진 상태에서 입원하고 수술 받고, 물리치료 받고 하던 때였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간호원들에게 감명을 받았다. 그중 필리핀 여인 간호원이 있었다. 이 젊은 여자는 워낙 피아니스트 였다. 한데 화상을 입고 손가락이 붙어 버려서 피아노를 포기하고 간호원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위로와 친절은 잊을 수가 없다. 비듬이 많아 머리가 가려워 못 견뎌하는 나를 의사의 허락을 받고 침대 채 목욕실로 끌고 가 머리를 감겨준 여인이었다. 나더러 다리 나으면 스키를 하라고 위로하던 여인이었다. 이젠 이름도 모습도 잊고 그저 그때의 친절만 기억하고 감사할 뿐이다.

 

1986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교환교수라는 신분으로 Charlotte 에있는 University of North Carolina에를 갔다. 나를 맞아준 이는 (collaborator) Dr. Bill Heller였다. 비행장에 이름 쓴 판을 들고 마중해 준 그가 인상적이었다. 숙소를 준비해 주고, 연구실을 만들어주고, 공부 할 수 있는 여건과 재정적 지원 마련, 홍익대학과의 자매결연 등 모든 일을 도와 주었고 후에 홍익대학교를 방문하게 되어 서울을 소개하고 하였다. 그와 함께 하교간의 자매결연 등을 추진한 국제 관계 실무담당 교수는 Dr.Harold Josephson 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폐암 투병 중이었다. 그는 건강한 사람보다 더 열정적으로 일하였다. 1995년 여름방학중 학생들 연수를 위해 다시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부총장이 된Dr. Josephson은 세 번째 과의 투병 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열적이었다. 이미 목발을 집고 장애인 자동차를 타는 형편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말에 암 수술 삼일만에 학교에 나와 정상적으로 일을 하곤하였다. 그의 강한 정신력과 철저한 생활태도에는 누구나 혀를 내둘렀다.

 

내가있는 학과에서 오랫동안 영어를 가르친 친구는 Joe Ruesing이다. 같이 있을 때 늘 같이 등산을 하였다. 지금은 Hawaii에 살면서 지난 여름 잠시 서울에 와 다시 북한산엘 함께 오르기도 하였다. 만나면 편하고 무슨말이라도 할 수 있는 친구다. 그는 홍대에서 가르치는 동안 철저히 교재를 준비하곤 하였다.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에 오래 있으면 요령이 생겨서 필요한대로 미국식, 한국식을 적용하는 편의주의자가 된다. Joe는 전혀 그러질 못했다. 오히려 미국식, 한국식을 학생들 편에 적용하여 늘 고생을 사서하는 친구였다. 그의 관심과 걱정은 지구였다. 공해문제, 오존층 파괴문제, 동물들 남획으로 말미암은 멸종문제 등을 걱정하곤하였다. 종교는 없었으나 그처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또 그것들의 먼 훗날까지 걱정하며 사는 친구였다. 어느 날 혼혈아 한 명을 입양하겠다더니 입양수속을 마치고 한 여아를 입양하였다. 어찌된 건지 그 갓난 아이는 정말 볼 수 없이 작고 말라 있었다. 영양부족인지, 출생자체에 문제가 있는지 며칠 살것 같지도 않은 아이였다. 내 눈치를 알았는지 이유를 말해 주었다. 이왕 버려진 아이를 입양할 바엔 누구의 관심도 못 끄는 어려운 지경에 있는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 형편없는 지경의 아이를 입양하니까 대사관 직원이라던가도 의심을 품더란다. 혹 특별히 돈받고 입양하는 것 아니냐는 눈치로 자꾸 이유를 묻더라나 . 그 아이는 그 후 건강하게 잘 자랐다.

 

이름은 잊었지만 잊지 못할 의사 한 분이 있다. Seattle에 있을 때였다.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진찰을 받게 하려고 대학병원엘 갔다. 수속을 마치고 한 의사와 간호원이 할머니를 데리고 진찰실로 들어갔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몇 시간이 지나서야 할머니가 나오고 의사 간호원도 따라 나왔다. 한데, 의사는 땀투성이고 가운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알고보니 그 할머니의 진찰은 몸 전체를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진찰해야 하는 것이었단다. 그 할머니 말이 한 평방 센티도 빼놓지 않고 눌러 보더란다. 그래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보호자격인 내게도 설명해 주었다. 그 철저한 진찰이 그 의사의 몸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런 이들이 미국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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