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먹어도 개와는 안 먹는다

아픔을 안고 산 사람들

석전碩田,제임스 2008. 8. 9. 18:28

나의 할머니는 내 계산으로 내가 태어날 때 마흔 셋이었고 내가 할머니라 부르며 따르던 때가 사십때 후반이었고 나의 중 고등학교 시절에 할머니는 오십대셨다. 생각해보면 나의 할머니였지 실제로 할머니는 아니셨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로 잡혀 옥살이하다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가 남긴 두 아들을 데리고 과부가 된 게 스물 다섯이라 했다.  

 

안동(安東)장씨 장손며느리로 아마 문중 땅이 좀 있어 맡아 관리를 했던가 보다. 할머니 표현으로 ()가네 것덜()’이 할머니에게 개가(改嫁) 할 것을 강권했던 모양이다. 그래야 문중 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랬음직하다. 어느 날엔 몇 놈이 들이닥치더니 칼을 목에 들이대며 시집갈 거냐 안 갈거냐 위협을 하더란다. 할머니는 티꺼운 것덜 (더러운 것들) 띠르라(찔러라).“ 했단다. 훗날 할머니는 것덜(그것들) 띠르래니(찌르라니까) 못 띠르더라(못찌르더라)“ 하곤 하셨다  

 

문중에 제사도 많았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그 많은 귀신당적(신주부적 등?)‘ 들을 불태워 버리고 기독교룰 받아들이셨다. 할머니로 말미암아 우리 집은 대를 잇는 기독교 집안이 되었다. 할머니는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무섭고 한 여인이었다. 세상의 부조리, 불평등, 불의 등을 아시고 늘 죽은 놈의 좆 외엔 곧은 게 없다.“고 육두문자를 써가며 비판하곤 하셨다. 음식을 가지고 푸념하면 그르케 먹으문 띠래(똥이) 관쓰구 나온대던?“ 하고 핀잔을 주셨다.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하면 나가 바람 쐬라.“ 하셨고,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면 나가 띠싸라.“ 가 유일한 진단이요 처방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아끼면 애끼면 띠된다고도 하셨다  

 

나는 개를 좋아하였다. 그래 개를 키우면 개똥 치우는 일은 의례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는 개똥 치울 줄 아는 놈만이 개 키울 수 있다고 훈계하곤 하셨다. 생각해보면 명언이셨다. 우리는 47년 월남하여 강원도 영월 산골에서 6.25를 만났다. 누구나 그랬듯이 잠시 피난갔다 온다하여 할머니는 집을 지키시기로하고 부모님과 어린동생들이 피난을 갔다. 고생 끝에 집에 돌아왔을 때의 기쁨이란! 나는 한 십리 쯤 남았을 때부터 계속 뛰어 집에 도착하여 할머니를 찾았다. 무사하셨다. 인민군 후퇴 바로 이튿날이 월남한 사람들 총살하는 날이었단다. 하룻밤 상관으로 할머니는 살아 남으셨다. 할머니는 태연하셨다. ”죽인 대더니 와 덜 안 부러내나 하구 이섰디.“ 하실 뿐이었다  

 

그런 나의 할머니는 전쟁 전후해서 아들 잃고 네 손자녀를 잃었다. 후엔 며느리까지 먼저 보냈다. 할머니는 살림하시는 일 외엔 늘 성경을 읽으셨다. 성경을 읽으시다 돋보기 아래로 눈물을 흘리시며 먼 곳을 보곤 하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강하다 못해 독한나의 할머니는 그렇게 아픔을 참고 계셨다  

 

40에 세상을 떠난 나의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네 자녀는 잃고 남편 잃고 (그 때가 스물일곱이셨다) 홀 시어머니 모시고 모진 고생을 하며 또 투병생활까지 하면서도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나도 어머니 돌아가시고도 울지 못했다. 도대체 눈물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야 산소를 찾아가 실컷 울었다. 그 분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나 신앙을 지키고 승리함으로 오늘은 천국에서 편히 쉬리라는 것을 믿고 위로 받으며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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