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먹어도 개와는 안 먹는다

등산

석전碩田,제임스 2008. 8. 9. 18:26

가까운 선배의 조언으로 산에 다니기 시작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그것도 무슨 명산을 일부러 찾아다닌 것이 아니고 집에서 가기 편한 북한산엘 주로 다녔다. 한 주에 두 번 혹은 세 번씩은 꼭 다녔으니 북한산만 해도 적어도 천 번은 넘게 다닌 셈이다. 주위에서는 한 곳만 다니면 지루하고 싫증나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드문 드문 다니면 같아 보일지 몰르지만 아주 자주 다녀 보면 갈 때마다 달리 보이는 게 산이다. 어떤 때 연 이틀을 가 봐도 다른 것을 본다. 작은 꽃 봉오리가 커졌다든가, 혹은 어제까지 매달려 있던 잎이 떨어졌다든가 등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갈수록 새롭고 볼수록 아름답고 좋은 게 산이라 마치 고전음악과도 같다. 늘 같은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이유는 또 있다. 늘 다니는 곳이라 익숙해서 긴장해서 걸을 필요가 없다. 어디는 평지고 어디는 고갯딜이고...를 다 알고 어느 돌은 밟으면 위험하다는 것까지 안다. 그러니까 걷는 것은 발과 다리에 맡기고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가 있다. 걸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 두는 게 습관이 되었다.  

 

 

산에 다니면서 느낀 것 또 하나는 느리더라도 움직이면 간다는 것이다. 힘들어 쉬면서, 절며 천천히 걷는 노인을 본다. 좀 앉아 있다보면 그 노인은 저 멀리 가 있다. 산은 그저 느려도 걸으면 목적지에 닿게 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험한 곳도 한 발짝 내딛다 보면 벗어난다. 험한 곳일수록 지나고 나면 흐뭇하다. 옛 사람이 읊은 대로 높아 뵈도 험해 뵈도 움직이면 가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확인했다. 그렇다고 뭐 산을 정복한다거나 따위의 느낌은 없다. 그저 거대한 자연의 덕을 입는다는 느낌 뿐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푸근함을 주는 산이지만 언제나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산임도 알았다. 언젠가 태풍이 와서 온통 물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산엘 다니는데 일기에 영향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잔뜩 감기에 걸려 있어도 산에 가는 날에는 산엘 가야 편했다. 그래 같이 있는 교수 한 분은 나를 가리켜, "자기 결심 구애 실천증 환자"라고 하였다. 그래 예외없이 그 날도 북한산엘 올라갔다. 산엔 아무도 없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고 산 위의 절에 도착했다. 그 절 중이 펄쩍 뛰었다. 이런 날 산에 오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방송도 못 들었느냐고. 이런 날엔 비가 아니라 돌이 날아다닌다고. 무안하기도 하고 은근히 겁도 나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큰 일이었다. 올라올 때까지도 괜찮던 산길이 전부 개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이러다가 조난을 당하는 구나 싶었다. 일단 겁을 먹으니 다리에도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 비 멎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워낙 많이 다닌 길이라 익숙함직 하건만 물이 차 버려서 길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마음을 다져 먹고 허벅다리까지 빠지는 산길을 걸어 내려와 평지에 닿으니 저절로 뒤돌아 산을 보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아름답고 경외로운 산을 망치는 이들이 바로 이 산을 관리한다는 자들이고 이 산을 사랑한다고 하는 이들임은 아이러니다. 옛 성곽을 복원한답시고 오히려 옛 성터 마저 훼손하고 나무를 잘라낸 자들은 바로 산의 관리를 맡은 자들이었다. 복원은 커녕 헬리콥터로 돌을 날라다가 타일처럼 사용해서 쌓은, 옛 성곽과는 전혀 다른 담을 쌓아 놓았다. 자연스런 산길을 막고 나무로 다리놓는 자들도 그들이다. 그런데도 화장실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지리산 천왕봉이나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가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악취를 기억할 것이다.  

 

 

하와이 힐로(Hilo)에서의 경험이다. 친구와 외진 산엘 2000m 가까이 올라갔다. 산딸기가 많아 그걸 따먹으며 올라갔다. 딸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하는 수 없이 으슥한 곳을 찾았다. 한데 그 으슥한 곳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뭔가 하고 가보니 바로 화장실이었다. 내심 놀라며 반가워 들어갔다. 화장실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화장지도 놓여 있고 또 여분 화장지도 있었다. 게다과 화장실은 수세식이었다. 다시 한 번 놀랐다. 미국의 이 행정적 관리력, 국민들의 공공심 등이 거대한 나라 미국의 질서를 유지하는구나 싶었다.  

 

 

또 산을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이들은 산을 사랑해서 온다는 등산객들이다. 그들은 소음공해를 만든다. 다람지가 먹을 도토리를 싹쓸이한다. 그 흔하던 원추리 꽃도 볼 수가 없다. 싹만 나면 나물이라고 다 뜯어 가기 때문이다.  

 

 

이제 산에 가는 일이 즐겁기만 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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