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隨筆 · 斷想

삶의 스토리텔링을 생각하며..

석전碩田,제임스 2008. 7. 25. 11:33

 

문학을 지망하는 지인이 있었습니다. 특히 시를 좋아해서 가끔씩 저에게 시집을 선물하곤 했지요. 아마도 중년의 나이에 제가 서점의 시집 코너에서 서성이게 만든 장본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분이 시에 관심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대화 중에 자신은 시 보다는 소설에 더 관심이 많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삶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장점이 시보다는 소설이 더 탁월하기 때문이랍니다. 아마도 그 분은 자신이 겪고 있는 남다른 삶의 큰 무게를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본인도 치유받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과 자신의 삶을 공유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자신의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스토리텔링..

요즘 제가 화두로 잡고 있는 주제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존재'라는 생각에까지 미쳤습니다. 주변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세상입니다.  사람의 수에 따라 이야기의 수가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모두 소망스럽고 복스런 이야기, 자신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2천년 전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하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소개하기 위해서 바로 이 스토리텔링을 탁월하게 활용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고, 몸소 본인이 사랑의 이야기를 실천하면서  대속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했으니까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계신지요?  오늘 조간 신문을 읽다가 어느 소설가가 쓴 컬럼을 읽으면서 또 다른 한 이야기를 만납니다.  그도 역시 소설가 답게 이야기의 힘, 그리고 삶은 곧 스토리텔링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천해내는 듯 해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산책] 시간의 추억

처음 보는 남자들끼리 군대 이야기 하나로 금세 허물 없어지는 것을 종종 본다. 만기 전역한 남자들이 은근히 목에 힘을 준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복학생들이 ‘야상’을 걸치고 수업에 들어오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군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시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나 그 시간 잘 견뎌냈어,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는 것이다.

진통부터 출산까지 분만 과정을 함께했던 남편은 ‘흐르지 않을 것 같던’ 그 시간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에게는 그런 경험이 또 있었다. 신병 훈련소에서의 그 시간은 흐르되 흐르지 않는 시간이기도 했다. 6주라는 정해진 시간이 있었지만 6주 후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시간이기도 했다. 낯선 곳에 대한 공포, 엄격하고 난폭한 문화에 대한 공포…. 이성을 마비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공포라고 생각했다. 날짜는 물론이고 요일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았다. 훈련이 없는 주말인데도 조교들이 왜 그들을 풀어놓은 걸까 알지 못했다. 단지 잠깐의 평화로운 시간이 언제 끝날까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그가 분만실에서 훈련병 시절의 공포에 젖어 있는 동안 당사자인 나는 시간을 초월했다. 고통은 시간을 늘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시간을 잊게 한다. 그때 나는 내 육신을 홀연히 떠나 나를 타인화할 수 있었다. 1분을 1분으로, 30분을 30분으로 평소와 똑같이 느꼈다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없이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시간의 힘이란 대단하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다가 왜 하필 1001일이었나 궁금해졌다. 아내의 부정에 분노한 왕은 성 안의 모든 처녀들을 아내로 맞아 하룻밤을 보내고는 다음 날 죽여버린다. 세헤라자드는 밤마다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의 이야기는 왕의 호기심이 절정에 달했을 때 끝이 나는데 그녀가 믿은 것은 이야기의 힘이고 시간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 1001일, 누군가에게는 전광석화와도 같은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영원일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다른 시간이 흘러간다.

구로공단이라는 역이 있었다. 그 이름이 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고자 구로디지털단지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탈바꿈한 역이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기륭전자라는 회사 이름을 안 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곳의 여직원들이 불합리와 부당함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안 지 얼마되지 않았다. 벌써 그들의 이야기는 1000일하고도 60일이 넘었다.

왜 우리 국민은 부자들에게 인색한 거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지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구로공단에서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공단 근처의 한 한의원 대기실에 서너 명의 남녀가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가까운 곳에 근무지가 있는 듯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편의점에서 사온 냉동 피자로 점심을 때우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김수현 극본에 차인표, 이영애 주연인 드라마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차인표가 재벌 아들역을 맡았는데 드라마 속에 나타나는 재벌들의 생활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그의 대사 중 무언가가 남자들의 비위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쳇, 코웃음을 치며 어이없다는 듯 텔레비전을 외면하던 한 남자의 표정이 그 뒤로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뭔가 손써볼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 노력해도 되지 못할 게 뻔한 것에 대한 체념, 그런데도 불쑥불쑥 머리를 드는 불합리한 것에 대한 분노. 그런 것들이 혼합되어 부대찌개처럼 파르르 끓어오르는 얼굴.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일확천금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정직하게 일한 대가였다. 1001일은 차갑고 잔혹한 왕의 마음을 녹일만한 시간이었다. 기륭의 1060일, 그들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또 시간의 기만성일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시간이 저마다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성란 소설가(세계일보 2008. 7.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