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35>경복궁과 비보풍수 | ||
관악산 불기운 못막아왕실 '내우외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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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결심한 뒤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궁궐을 새로 영건하는 일이었다. 대궐은 왕권의 상징일 뿐 아니라 함부로 범접 못할 왕실의 위엄이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태조는 이 일을 왕사였던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 정안대군 이방원(후일의 태종대왕) 등에게 맡겼다. 그러나 궁궐의 터와 좌향을 정하는 중대사를 놓고 세 사람의 의중은 다음과 같이 달랐다.
▲무학은 새로 세운 왕조가 무탈하게 백성을 위하면서 천년사직으로 이어지길 사심 없이 원했다. ▲삼봉은 우선 장자보다 차자가 왕위를 잇는 궁터를 눈여겨 두었다. 신덕왕후(태조의 계비) 강씨 소생인 방석(태조의 제8남)을 세자로 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안대군도 당장은 장손이 흥성하는 자리를 원치 않았다. 자신이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서열상으로는 용상에 등극할 가망이 희박했던 이유에서다. 이때 삼봉과 정안대군은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나 이 문제만으로는 하나가 되었다. 무학이 고른 대궐 터는 인왕산을 주산 삼아 유좌(정서)묘향(정동)으로 앉혀 장남으로 하여금 왕통을 이어가는 왕실의 안정을 상징했다. 현 사직단 좌측의 배화여고 자리 일대다. 그리했더라면 우람장중한 북악이 좌청룡으로 기복하며 동대문 낙산까지 굽이쳐 대군 왕손들의 기세가 등등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삼봉과 정안대군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정궁(正宮)을 앉히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무학은 두 사람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태조도 방석에게 뜻을 두고 있는지라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삼봉과 정안대군이 주장한 곳에 세워진 대궐이 경복궁이다. 그 후 무학은 한동안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두 사람과도 거리를 두었다고 전한다. 왕실의 앞날이 걱정이었고 불을 보듯 뻔한 왕위계승 다툼이 눈앞에 선해 심사가 편치 않았던 것이다. 태조 3년(1394) 경복궁의 대역사가 진행되면서 주산과 좌향을 잘못 택한 탓에 보강해야 할 곳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왔다. 이때 풍수에 달통했던 삼봉의 비보(裨補) 풍수가 여지없이 적용되었는데 그 흔적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허약한 동쪽 좌청룡 끝에 흥인문을 건립하며 산을 잇는다는 의미로 지(之)자를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현 동대문)이라 이름지었다.
이 같은 내용들은 세종대 대학원에서 ‘조선초기의 풍수지리사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송암(松巖) 강환웅(姜煥雄·74) 교수 논문에도 나타나 있다. 송암은 풍수학계서는 드물게 일본 와세다대학 지리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경대와 서울사이버대학에서 강의하는 현직 교수다. 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을 겸하면서 수많은 풍수 관련 논문과 저서를 갖고 있다. 첫 상면과 함께 나선 경복궁 취재에는 김금희 사무국장이 동행했다. “땅은 신기하게도 격국(格局)에서 한번 어긋나면 모두가 뒤틀려 버립니다. 마치 첫 단추를 잘못 낀 것과 비유할 수 있어 옷매무새 전체가 변형되는 것이지요. 북악을 주산으로 배치하다 보니 목멱산(남산)을 안산으로 하게 되고 화형산인 관악산이 조산(朝山)이 되어 버린 것이죠. 화마(火魔)를 피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래서 풍수는 무서운 땅의 법도입니다.” 차근차근 풀어내는 송암의 경복궁 풍수비사는 현장에서 나경으로 확인하고 육안으로 계측하니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그동안 임금이 정사를 펴오던 대궐쯤으로만 알아오던 일반인들도 세심히 눈여겨보면 수긍이 갈 만한 자상한 설명이다. 경복궁 후원인 향원정 뒤쪽에서 세종로 방향을 가리키며 담론은 이어진다. “북악산→경복궁→숭례문(남대문)→관악산이 일직선입니다. 남산도 약간 비껴 있어요. 저 관악산의 불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옛 길은 남대문에서 롯데호텔로 우회전한 뒤 광교를 좌회전하여 종로 쪽으로 돌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화기를 직접 피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됐던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양 옆에 해태상을 세워 관악산의 화(禍)를 제압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해태는 바다 속에 산다는 상상의 동물로 물기운을 몰아온다고 믿었다. 남쪽은 화기를 안고 들어오는 방위여서 자좌오향에서는 오향의 문을 피하는데 북악을 주산으로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무학의 예언대로 왕통은 왕후 적자(嫡子)인 대군(大君)이 제대로 잇질 못하고 후궁 손인 군(君)들이 등극하면서 왕실의 내우외환은 끊일 날이 없었다. 장자가 왕위에 오르면 일찍 죽거나 반정이 일어나 뒤집어지곤 했던 것이다. 송암은 이 같은 불행의 연속이 중국에서 주로 사용된 향법풍수를 적용한 데서 원인을 찾고 있다. 산을 등질 수 없었던 평원지대서 우선시되었던 건 물길을 살피는 이기풍수였는데 산악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 황제궁인 자금성을 자좌오향으로 앉히고 주산과 좌청룡·우백호를 가산(假山)으로 쌓았지만 지기가 오래갈 리 없다는 이치다. 이같이 우리나라에 자생한 고유 풍수는 고대 치우천왕(기원전 2707년 즉위) 때로부터 기원을 찾으며 그 실례를 지석묘(고인돌)에서 입증할 수 있다는 논거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강화, 고창, 화순 등지의 지석묘군(群)을 가보면 사신사가 뚜렷하며 산악과 평원을 구분 지은 비보풍수가 놀랍다는 것이다. 중국 풍수는 3000여년을 헤아리고 우리 풍수는 5000여년의 유구한 역사인데 이제 우리도 ‘중국사대주의 풍수’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삼봉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정안대군은 왕실의 정궁이자 법궁인 경복궁의 허한 곳곳을 비보책으로 보강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의 연회장소로만 알고 있는 경회루도 사실은 건방(서북쪽)의 약한 물길을 가두기 위해 판 인공 연못이에요. 세검정 쪽에서 발원하는 내득수(청계천)가 약하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송암의 설명에 ‘그토록 넓고 깊게 판 경회루의 흙을 어디에 썼을까’가 궁금해졌다. “태종대왕도 신풍에 가까운 풍수였어요. 좌청룡이 약한 경복궁의 허점을 알고 현 민속박물관 쪽에서 약하게 내려오는 은맥(隱脈·숨은 맥)을 돋워 가룡맥(假龍脈)으로 이은 뒤 왕비 침전인 교태전 뒤에다 아미산을 조성했습니다. 풍수의 달인이 아니고는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이 같은 가산 조성은 종묘 앞의 야트막한 안산(案山)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장을 답사하니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에서 향원정을 거쳐 교태전 후원까지 이어진 인공용맥이 나지막하게 드러나 있다. 이후 태종은 1417년 풍수지리를 관장하던 서운관을 없애버리고 비기도참서도 소각해 버렸다. 경복궁에서 경회루(국보 제224호)로 나가는 서쪽 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보행에 불편을 주는 기둥 몇 개가 서 있다.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이 열주(列柱)도 서방쪽 살풍을 막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도성 북쪽에 있다 하여 북궐로도 불린 경복궁(사적 제117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면서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창덕궁(사적 제122호)과 별궁(別宮)으로 사용되던 창경궁(사적 제123호)도 함께 불탔으나 두 궁은 복구되었다. 270여년간 폐허로 방치되던 경복궁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로 원형보다 더욱 격식을 높여 복원된다. 이런 경복궁을 좀 더 눈여겨보면 음양오행의 이치가 빠짐없이 적용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동에는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남방엔 광화문(光化門), 북으로는 신무문(神武門)을 세웠다. 오행에 따른 배치다. 임금의 침소인 강녕전 뜰은 남성을 상징하는 철(凸)자로 튀어 나왔고 왕비가 잠을 자는 교태전 마당은 여성을 상징하는 요(凹)자 구조로 조성해 놓았다. 음과 양을 조화시킨 것이다. 경복궁은 역사적으로 큰 변란을 겪은 굴곡의 현장이기도 하다. 어린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쫓겨나고, 시대를 앞선 개혁주의자 조광조가 중종의 친국을 받고 사약을 받았는가 하면, 명성황후가 일인자객에게 시해되는 치욕의 한을 남기게도 된다.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궁안의 전각 4000여채를 헐어 민간에 방매하고 대궐의 존엄성을 훼손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는 정문인 광화문을 북쪽으로 이전해 버리고 근정전마저 완전히 가려 옛 모습을 인멸시켰다. 현재 경복궁은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사업이 다각적으로 진행 중이며 1968년 철근 콘크리트조로 세워졌던 광화문도 제자리를 찾아 복구 중이다. 새로 복원된 청계천은 경복궁의 내수(內水)에 해당하며 외수(外水)인 한강수와 합류한다. 풍수적으로 내수가 우에서 좌로 기울며(右水倒左) 흐르다가 외수와 합쳐진 뒤 좌에서 우로 반전하여(左水倒右) 도성을 감싸 안는 국세는 참으로 귀한 명당길지라고 송암은 강조한다. ‘경복(景福)’이란 궁 이름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온 것이다.
이규원(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2007. 6. 22 세계신문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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