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隨筆 · 斷想

잠깐, 30년이다

석전碩田,제임스 2016. 6. 23. 17:45

내게 배달되는 <공감>이라는 주간 잡지가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만드는 정부정책 홍보지라고나 할까요. 장관으로 간 우리 대학의 교수와 평소 친하게 지내서인지 몇 년전부터 꾸준히 배달되어 옵니다.  

 

다른 홍보성 기사들이야 늘 그렇고 그런 내용이라 그냥 일별하고 말지만, 꼭 빼놓지 않고 읽는 페이지가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 고정 컬럼 식으로 게재되는 글이 그것인데, 소설가라든지, 시인, 그리고 책의 저자들이 허황된 이론이나 자기 자랑을 늘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신변 잡담을 곁들여 진솔하게 쓰는 미셀러니이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때로는 깊은 공감을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이런 멋진 글을 나는 쓸 수 없을까 부러워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엊그제 배달 된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시인 원재훈이 쓴 글인데, 한 문장 한 문장이 공감이 가는 진솔한 글이어서 공유하려고 이렇게 갖고 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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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도서관 앞 벤치에서 길게 누워 낮잠을 자곤 했다. 낮잠이라기보다는 잠깐 눈을 붙이는 정도였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학교를 한 바퀴 돌고, 도서관 앞 벤치에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길게 누웠다. 가방을 베개 삼아 눈을 감고 대학 신문으로 얼굴을 덮었다. 학생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내 얼굴에 떨어진다.  

 

바람이 불어 신문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한 손으로 신문을 단단히 잡는다. 모든 게 똑같았다. 눈을 감았지만 마음이 어수선해 다시 일어나 앉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30년 전의 내가 여기저기에서 돌아다닌다. 잔디밭에 호스로 뿌린 물방울처럼 학생들은 신선하기만 하다. 그 시절 나도 저러했겠지.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30년이 흘렀다. 물론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강물처럼 반짝거리면서 흘러갈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한순간에 30년을 살아버린 느낌이 들어 허무하기조차 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도서관 앞에서 여기라니? 이젠 이런 어리석은 질문도 한다. 한밤중에 집에 든 도둑처럼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백발이 돋아 오르고, 읽고 싶은 책은 물론 가까운 사물도 잘 보이지 않는 노안이 친구처럼 찾아왔다.  

 

문득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승려인 조신이 수도를 하다가 법당에서 잠이 들었다. 잠깐 자다가 깨어나니 자신이 연모하는 귀족 여인이 절에 와 있다. 승려는 그녀와 사랑에 빠져 줄행랑을 치고, 그녀의 약혼자에게 쫓겨 한평생을 살게 된다. 사랑 하나 믿고 도망쳤지만 지독한 가난과 귀족 집안의 복수가 두려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가난 때문에 자식마저 굶어 죽고, 죽은 아이를 길거리에 묻을 수밖에 없다. 부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서로 헤어진다. 조신은 목숨마저 바치려고 했던 그녀와 헤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잠에서 깨어난다. 모든 게 꿈이다. 자신이 엎드려 소원을 빌던 바로 그 자리에서 올려다보니, 부처님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본다. 그 순간 조신은 대오각성을 한다. 조신이 잠깐 낮잠을 잤는데 한평생을 살고 하얗게 늙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조신의 꿈으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춘원 이광수가 소설로 쓰고, 배창호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다.  

 

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인생 30년이 한순간에 흘러가버렸다는 감상에 젖게 된다. 그것이 잠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생각해보면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 것 아닐까? 나는 아직, 한평생을 살다가 죽기 전에 부른다는 백조의 노래를 아직 부르지 않았으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인생이 덧없다고 해도 그것은 지나고 나서의 이야기일 뿐이고, 가야 할 길이 멀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들 앞에서 문학 강연을 하고, 선생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밀린 세금과 여러 가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살기가 만만치 않다.  

 

지나고 나서 보는 길과, 지나가야 할 길을 보는 마음은 천지 차이다. 영원을 살 것처럼 이상을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려고 한다. 우리가 따로 혹은 같이 걸어가야 할 길의 마음은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빛나야 한다. 비록 내가 도서관 앞에서 잠깐 눈을 감고 뜨는 사이 30년의 세월을 살았지만, 그것은 앞으로 30년이 얼마나 빨리 흘러갈 것인지에 대한 신의 경고일 수도 있다.  

 

잠깐 30년이다. 이제 한 번쯤 서 있는 자리에서 뒤돌아보자. 불과 얼마 전에 새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올여름은 무척 더울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지난겨울의 추위가 물러간 것처럼 아마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 더위 속에서 내가 할 일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자. 대나무의 마디를 생각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져 꼿꼿한 대나무가 된다. 인생은 결코 꿈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나가야 할 돌과 바위로 된 파도이고, 먼 하늘에 걸려 있는 무지개를 쫓아가는 지난한 여정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대학 도서관 앞에서 나는 다시 30년 후의 내 모습을 생각했다.  

 

· 원재훈 (시인)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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