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산행후기

[퍼온글]양평 여행

석전碩田,제임스 2016. 5. 11. 15:53

경기도 양평 지평면에는 망미리(望美里)가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논리와 섬부리와 신대리를 합쳐서 지은 이름이니 오랜 지명은 아니다. 중심 마을은 섬부리다. 섬부리는 '석불리(石佛里)'가 바뀐 지명이다. 예로부터 마을 어딘가에 돌부처가 있다고 했으나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1967년 11월 15일 마을에 철도역이 생겼다. 이름은 석불역(石佛驛)이다. 이용 주민이 줄어들면서 석불역은 2010년 열차가 서지 않는 무정차역으로 변했다. 첫차를 타고 서울 경동시장으로 가서 야채를 팔던 농민들과 그 돈으로 학교에 다니며 자라난 농민의 아이들이 반대했다.

폐쇄 위기에서 부활한 양평 석불역 사진
폐쇄 위기에서 부활한 양평 석불역.


2012년 2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아비의 아비와 그 아비의 아비들이 소문만 듣고 자랐던 그 돌부처가 망미산 기슭에서 발견된 것이다. 잊혔던 돌부처가 환생한 데 이어 2013년 12월 28일 원색 페인트칠을 한 장난감 같은 석불역 새 역사가 문을 열었다. 부처와 역이 돌아오더니 하루 네 차례 석불역에 서는 열차에서는 앙증맞은 석불역을 찾는 여행자들이 쏟아졌다. 부처님 가피라고 해도 좋고 주민들 애정이라고 해도 좋고, 관계 당국의 주민 위주 행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땅과 땅 이름과, 땅에 사는 사람들이 맺은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因緣, 어비계곡 민기남과 사충성

민기남은 경기도 가평 설악면 가일리 여자고 사충성은 서울 남자다. 1948년생 동갑이다. 두 사람은 지금 양평 옥천면 용천리 어비계곡에 산다. 어비계곡은 '물고기가 날아다니는(魚飛)' 계곡이다.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남편과 아내를 떠나보낸 두 영혼이 부부가 된 지 24년이다.

어릴 적 민기남은 등산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일부러 산에 간다고? 나는 먹고살려고 나물 캐러 저 험한 산을 헤맸어. 여기가 전쟁터였잖아. 산에 가면 지뢰밭인데 그것도 모르고 막 다녔어. 빨간 지뢰밭 표시판 보면 쓰레받기 삼겠다고 서로 뜯어서 가곤 했지. 그러다 지뢰 터져서 허벅지며 넓적다리 잘라진 애들 많았어. 그런데 그 산을 놀러 간다고? 성렬이 아버지는 저기 바위 옆에서 호랑이를 만났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배 물고 천천히 집으로 도망왔더니 바지에 똥이 한 바가지더라나, 호호호."

어비계곡에 사는 민기남(왼쪽)-사충성 부부 사진
어비계곡에 사는 민기남(왼쪽)-사충성 부부.


삶은 둔탁했다. 모진 시련도 없었고 날카로운 행복도 없었다. 이북에서 피란 온 아버지는 나이 오십에 외동딸 민기남을 낳고서 딸이 열세 살 때 하늘로 갔다. 민기남은 엄마 손 잡고 양평장에서 소금이랑 간고등어 사서 집으로 걸어올 때 정도가 행복했다. 남자를 만나 사랑도 해봤고 살림도 꾸려봤지만 삶은 시종일관, 고단했다. 그러다 1992년 서울에서 얼굴 시커먼 남자가 민기남을 찾았다. 남자 이름은 사충성이다.

사충성이 말했다. "나, 젊은 날 좀 놀았다. 영등포에서 이름 좀 날렸지. 그때 아내가 죽었다. 세상 별건가 싶어서 검은 시절 청산하고 양평에 사는 친구한테 갔다. 거기에서 이 여자를 만났다. 이 여자 아니면 안 되겠다 싶더라." 훗날 민기남이 말했다. "딱 보니까 몸 함부로 굴려서 얼마 못 살겠더라. 그런 남자 살려내면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여자와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마흔넷에 사랑을 했다. 가일리에서 산 너머 나오는 양평 땅 어비계곡 물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여전히 여자는 지뢰밭에 올라가 나물을 캤다. 남자는 개를 키웠다. 여자는 오가피며 당귀며 몸에 좋은 온갖 것들 캐 와서 가마솥에 펄펄 끓여 병든 남자에게 먹였다.

그러다 1994년 인생이 바뀌었다. 민기남이 말했다. "나물을 다듬고 있는데 등산객 부부가 집에 와서 밥 좀 달란다. 그래서 닭도리탕 드시라 했더니 내 몰골을 빤히 보더라. 머리는 산발에, 먼지로 얼굴은 새카맣게 해서 식칼을 들고 있으니, 나라도 못 믿었겠지." "정말 맛있냐"는 거듭된 물음에 "잡숫고 맛없으면 그냥 가시라"고 답하곤 부부는 닭 한 마리를 잡아서 내놨다.

먹으면서 남자가 웃고, 여자가 웃었다. 그걸로 둔탁했던 삶은 멈췄다. 어느 틈에 주말이면 '닭도리탕' 달라는 사람이 쇄도했다. 사람들이 그저 '민기남집'이라 부르기 시작한 부부네 산중 살림집에서 연일 닭들이 죽어나갔다.

남자가 말했다. "젊을 때는 '(주먹) 한 방에' 모든 일을 해결했다. 무책임했다. 내 나이 이제 칠십인데, 절반은 책임 있게 또박또박 살아왔다. 이 여자 덕이다." 봄비 내리는 계곡에서 여자가 숲을 바라봤다. "저 새싹들 봐라. 평생 저 숲을 보고 살았다. 참 지루했었는데, 지금은 사랑스럽다. 다 이 남자 덕이다." 서로가 서로를 덕이라 하니, 과연 인연이다.

임진왜란, 6·25, 사나사(舍那寺)

어린 소녀 민기남이 헤매고 다녔던 지뢰밭은 6·25 전쟁 때 생겨났다. 양평은 전쟁 때 최대 격전지였다. 용문산전투와 지평리전투는 1951년 각각 국군과 미·프 연합군이 거둔 최대 승전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양평에서는 대규모 의병 활동이 벌어졌다. 이후 1907년 일본군은 용문산 기슭에 있는 고찰 사나사(舍那寺)를 의병 본거지로 찍어 불태웠다.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따르면 일본군 토벌 작전에 용문산 일대 많은 사찰과 양평읍 시가지가 전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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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산 기슭에 있는 신라 고찰 사나사(舍那寺).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 6·25전쟁까지 사나사는 여러 전쟁을 겪어야 했다. 봄비에 만물이 푸르고, 절은 초파일을 준비 중이다. /박종인 기자


어찌 된 셈인지, 사나사는 전쟁과 인연이 깊다. 사나사는 신라 시대인 923년 창건된 절이다. 고려 때인 1367년 태고왕사 보우가 중건한 이 절은 200년 뒤인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소됐다. 그리고 구한말 다시 한 번 일본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나사는 6·25 전쟁 용문산전투에서 세 번째 초토화됐다. 절에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에는 화상 흔적이, 보우를 기리는 원증국사 비와 석탑에는 총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사바세계 만물을 치유하고 중생을 보듬어야 할 대가람에 이리도 흉터가 깊다. 흉터들은 역사가 되었다.

한음 이덕형, 그리고 양평

석불역 남쪽으로 구둔역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마을 산에 군사 아홉 부대가 있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구둔(九屯)이다. 1940년에 문을 연 구둔역은 결국 폐쇄됐지만 등록문화재 46호로 보존 중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몇 장면을 이곳에서 찍기도 했다.

임진왜란 초기 문경새재를 무혈 진군하고 탄금대에서 신립 부대를 궤멸시킨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양평을 휩쓸고 동대문을 통해 한양으로 입성했다. 9개 조선 부대도 소용없었다. 고니시 부대와 경쟁을 벌이던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용인을 거쳐 몇 시간 뒤 남대문으로 한양에 입성했다. 양평과 용인은 쑥대밭이 됐다. 기록에 따르면, "한양은 텅 비어 있었다". 1933년 일본 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통해 자기네 조상이 통과한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 1, 2호로 지정했다.

평생을 올곧게 산 한음 이덕형 묘소. 당쟁 와중에 공적을 박탈당해 낙향해서 죽었다. 양평 목왕리에 있는 묘소는 명나라 풍수가 두사충이 점지했다고 전한다.
평생을 올곧게 산 한음 이덕형 묘소. 당쟁 와중에 공적을 박탈당해 낙향해서 죽었다. 양평 목왕리에 있는 묘소는 명나라 풍수가 두사충이 점지했다고 전한다.


고니시 부대가 진군한 양평에는 이덕형이 살았다. 호는 한음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도 일본도 협상 대상으로 이덕형을 꼽았을 정도로 존경받는 협상가요 합리적인 정치가였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 이덕형은 세 차례 영의정에 올라 전쟁과 정치를 주도했다. 명으로 달려가 원군을 불러온 이도 이덕형이었고 왜군과 단신으로 협상을 한 사람도 이덕형이었다. 선조는 모친상을 당한 이덕형에게 끝까지 귀향을 허락하지 않고 옆에 뒀다.

그런데 광해군 때 이덕형은 당쟁 와중에 모함을 받고 모든 공적을 박탈당하며 양평으로 낙향했다. 낙향 한 달 만에 이덕형은 기력이 쇠하여 죽었다. 백사 이항복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고 그를 기렸다. 1759년 영조는 후손에게 대대손손 제사를 허락하는 '불천위(不遷位·사당에서 위패를 치우지 못하도록 하는 것)'를 허용했다. 이덕형은 지금 양평 목왕리에 묻혀 있다. 묫자리는 명나라에서 온 풍수가 두사충이 점지했다고 전한다. 묘소 가는 길은 짧되 숨 가쁜 산길이다. 묘소에서는 양평 땅이 한눈에 보인다. 바다에서 이순신이 나라를 살렸다면 이덕형은 더 큰 프레임 속에서 전쟁을 주도했다. 한음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일찌감치 패한 전쟁이었다.

카페와 러브호텔만 보이던 양평 땅에 이런 인연이 숨어 있다. 계곡에는 남 보기에 시시껄렁하되 우리네 민초들에겐 소중한 인연이 숨어 있고 산기슭에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감사해야 할 오랜 인연이 잠들어 있다. 석불역에서 천년 고찰 사나사까지, 천지 사방에 귀하지 않은 것 하나 없는 여행이었다.

[양평 여행수첩]

양평 여행지도


〈볼거리〉

1. 한음 이덕형 영정각과 묘소:
양서면 목왕리. 영정각과 묘소는 신도비와 떨어져 있다. 묘소로 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2. 민기남집: 유명산 어비계곡 안에 있다. 닭볶음탕 전문 식당. 야채와 고추장 양념닭을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로 끓여서 낸다. 4만원. 예약은 받지 않는다. 민기남·사충성 부부 사는 모습, 계곡 숲과 물길 산책도 추천

3. 사나사: 신라 때 만든 절. 경내 산책도 좋고 힘이 남으면 절 뒤로 나 있는 등산길도 좋다. 날이 더우면 절 아래 계곡도 추천. 계곡에는 함씨 설화를 담은 함왕혈이 있다.

4. 향기나는 뜰: 이덕형 영정각 옆에 있는 카페. 한마디로 '근사한' 집이다. 조경이면 조경, 인테리어면 인테리어, 요리면 요리 모두 10점 만점에 10점인 식당. 서울에서 패션 디자인과 원단을 하는 주인 부부가 운영한다. 여주인이 만든 액세서리와 옷도 판매. 각종 차와 음료, 비빔밥(1만5000원), 빵(1만원 선). 일요일 휴무. 양서면 목왕로 462, (031) 772-9911

5. 석불역과 구둔역: 각각 내비게이션에서 같은 이름을 검색할 것. 폐쇄된 구둔역은 역 안을 마음껏 걸어다닐 수 있다. 석불역은 인기 촬영지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