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隨筆 · 斷想

<밀양 배씨> 직장 동료 이야기

석전碩田,제임스 2015. 10. 5. 11:36

영화 <명량>에서 나의 직계 할아버지인 배설 장군에 대해서 잘못 표현하는 바람에 벌어진 소송 사건 때문에 작년부터 카페가 하나 개설되어, 뿔뿔이 흩어져 사는 우리 동네 후손들끼리 소통하고 있는 공간이 생겼습니다. 이 카페 공간에 제가 썼던 글 하나를 이곳으로 갖고 왔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직장 동료는 이번 831일자로 명예 퇴직을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글의 내용에서 말한 그것을 아직도 바로 잡지는 못했다고 하더군요. 무슨 말을 하느냐구요? ㅎㅎ 아래 글을 찬찬히 한번 읽어보세요. ^&^

 

  

 

최근 이곳 카페를 자주 드나들면서 씨족에 대한, 그리고 조상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시골 마을(경북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자리섬)에 살면서 대종중의 소임을 맡아 보셨던 아버지(在坤)의 영향으로 다른 친구들보다는 족보라든지, 씨족의 역사에 대해서 얻어 들은 바는 많다고 자부하면서 자랐던 게 사실입니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땐, 아버지의 부지런한 극성(?) 때문에 나를 비롯해서 자리섬 마을에 있던 동기 친구들 몇명이서 뒷개 석호 형님에게 가서 <명심보감>을 공부하기도 했으니까요. 그 때 외웠던 명심보감 귀절들은 아직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정도로, 나에게 두고 두고 영향을 미치는 공부가 되었습니다. 이미 2002년도에 작고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감사할 일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말, 가천중학교를 떠나 서울 덕수 중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고향을 엉겁결에 떠나온 이후 고향 자리섬은 언제나 아련한 추억 속에서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전학을 온 후 3, 4년 후, 내가 대학을 들어갈 무렵엔 온 식구들이 전답과 집을 처분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한 지가 벌써 30여년이 지나고 있는 셈이네요.  

 

제가 오늘 얘기하려고 하는 일화는, 벌써 15년은 더 지난 일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부서에 같은 회사 동료 직원이 전보 발령을 받아 왔는데, 성씨가 가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제가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본이 어디세요?" 그랬더니, 너무도 씩씩하게 ", 저는 밀양 배씨입니다."라는 답변을 하더군요. 평소에 저는 아버지로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받으면서, 자기의 성씨를 말할 때 "배씨입니다"라고 말하면 상놈이고, 반드시 "저는 성산 배가입니다."라고 답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직장 동료의 이 말을 들으면서 무의식 중이지만, ', 저렇게 배씨입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니 나처럼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렇게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밀양 배가라는 본은 처음 들어보는데....밀양 배가가 맞아요?"  

 

이런 대화가 있은 한 달 후 쯤이었습니다. 평소 그저 평범한 옷 차림으로 출근하는 그 밀양 배씨 직장 동료가 그 날은 마치 새 장가라도 드는 양 깔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출근했더군요. 아침 인사를 건네면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만 간단하게 답변했습니다.  

 

그 날 퇴근 무렵이 다 되어서야 그 분이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달 전 쯤 저와의 대화에서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의 성씨와 관련해서 이곳 저곳 수소문을 해서 알아봤답니다.결국 전국배씨종친회에 연락이 닿았고, 그곳으로부터 어떤 한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그 분과 여러 번의 통화 끝에 자기가 준비해야 할 서류들을 준비한 후 바로 그 날 만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저는 이 분을 저도 만나야 겠다는 생각에서, ", 그런 일이라면 저도 같이 가면 안될까요?"라고 했더니 흔쾌히 승락을 해주더군요. 그래서 만난 사람이, 당시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한문학과의 배상현 교수였습니다. 그의 자택이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평창동)이어서 우리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평창동을 찾았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온 집안이 고서들로 가득차 있어 그야말로 발디딜 틈이 없다는 표현이 적절했습니다. 내부 계단으로 2층으로 된 단독 주택은 책들로 뒤덮혀있었습니다. 정년이 가까와 온 연세이지만 아직도 맹열 정진하는 학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지요. 그 곳에서 우리는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배 교수의 특별강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족보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배가 족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마음 가짐으로 우리의 성씨에 대해서 이해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해박한 설명을 들으면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직장 동료의 본은 아이러니 하게도 다음과 같은 잘못에 의해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동료의 아버지 부터 엉뚱하게 바뀌어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이 직장 동료의 본은 곤양(昆陽) 배가였으나, 어느 동 사무소의 서기가 이기(移記)하는 과정에서 곤()자가 어려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객양(客陽)으로 옮겨 적었고, 몇 십년 후 그 다음 동서기는 나름대로 아는 척하면서 바로 적는다고 적은 게 객()자를 정확하게 밀양(密陽)으로 쓰는 바람에 <밀양 배씨>가 되고 만 오류 변천사를 확인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직장 동료의 할아버지 땐 객양 배가였다가, 그 아버지 때부터는 밀양 배가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배상현 교수님은, 바쁜 현대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현상이 비일비재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성씨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먹고 살기에만 바쁘다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므로 이제는 좀 옛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또 뿌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지요. 불행하게도 그 직장 동료는 그 이후 15여년이 지나도록 잘못된 본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사료들이 있지만, 법원에 가서 본을 고치는 정정 신청을 해야 하고, 또 그 사료와 더불어서 경기도 곤양 집성촌에 가서 족보를 확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인우보증까지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그동안 마음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엄두도 못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정년 퇴직 전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때 만난, 배상현이라는 그 동국대 교수는 이런 에피소드도 말해주시더군요. 본인은 곤산 배가 본인데, 한번은 성주군 대가면 도남을 들런 적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양호 형님께 인사드리고, 명함을 건네면서 혹시 자신이 배가 집안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보관하고 있는 문집이나 글씨들을 공짜로 번역해 주면 안되겠느냐고, 문서들을 복사해서 번역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자신을 내쫓았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당시에 빈번하게 일어난 농촌 지역의 재실 도난 사건 때문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으리라 자신도 이해하지만, 이제는 그런 귀중한 사료들을 보관만 할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젊은 후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밀양 배씨 직장 동료의 이야기는 그저 한 사람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이 땅에 ''라는 성씨만 갖고 있을 뿐 어떤 형태로든, 조상에 대해서 또 씨족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없는 사람들은 어쩌면 잠재적인 '밀양 배씨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우리 문중을 새롭게 엮어내는 일-그 일이 어떤 일인지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지만-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