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자치제 동시 선거가 있는 날, 모처럼 아침 시간을 한가하게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새벽기도를 다녀온 후 아내와 일찍 투표를 하러 갔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매일 골목길 어귀에 트럭을 세워 놓고 과일 장사를 하는 아저씨한테 며칠 전에 주문해 놓은 감자 한 박스를 건네 받았습니다. 싸게 구입했다는 흐뭇한 생각에 무거운 줄도 모르고 낑낑 거리며 들고와서 거실에서 박스를 여는데, 감자를 넣은 후 신문지로 덮은 신문에 실린 글의 제목에 눈길이 갑니다. <물 흐르듯이>. 신문의 컬럼이 실리는 면이 바로 눈에 들어왔던 것이지요. 제목이 마음에 들어 흙이 묻은 오래된 신문을 읽어 내려가는데 필자의 생각에 절로 동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투표를 하고 오면서, 한꺼번에 여덞개의 투표지를 주면서 인물을 고르라니 이건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불만 섞인 제 생각에 위로라도 하듯, 자리와 역할에 대해서 사색을 한 컬럼 내용이 여운을 남겨 줍니다. 저마다 공약을 내 걸고 열심으로 선거운동을 했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투표소에 들어가서 후보자들의 이름이 나열된 투표용지 앞에 섰을 때에는 정작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글을 쓰면서 '물 흐르듯이'라는 말의 한자어는 <법(法)>이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맞습니다. 세상을 물흐르듯이 산다는 것은 법대로 사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법은, 그 법이 있는 지도 모르게, 그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법이 최고의 법입니다.
모처럼의 공짜 휴일에 화사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거실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한 편의 컬럼이 저를 숙연하게 합니다. 행복한 하루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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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된 일이다. 후배 하나가 직장을 옮기면서 지금보다 보수도 많아지고 직급도 높아질 뿐 아니라 꽤 중요한 자리와 역할이 주어진다고 자찬이 늘어졌다. 어느 생맥주집에서다. 그의 자화자찬이 쉬지 않고 계속이어져갔다. 그로서는 본디의 성향대로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셈이었다.
가만히 그대로 듣고 있던 내가 노파심에서 한마디 충고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말을 꺼냈다. ‘왜 그 장수론이 있지 않으냐. 용장, 지장, 덕장이...’ 하고 여기까지 말하는데, 그가 손사래를 치듯 ‘아이, 다 알아요. 알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딴 것쯤 모를까 보냐며, 익히 알고 있다는 투로. 그래서 결국 아무 말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주고 싶다고 다 줄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나는 그 맨 꼭대기에 인(仁)을 얹어 강조를 해주고 싶었었다.
덕치(德治)를 넘어 서자는 뜻이다. 장수가 병졸과 역지사지를 하기란 쉽지가 않겠지만, 입장을 헤아리라는 것이다. 세세한 곳까지 형편을 보살펴서, 설복(說服)에 더해 감복(感服)을 불러오라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인(仁)은 “1.남을 사랑하고 어질게 행동하는 일. 2.(철학)공자가 주장한 유교의 도덕이념, 또는 정치이념. 윤리적인 모든 덕의 기초로 이것을 확산시켜 실천하면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유교사상에서 가장 중심 덕목이라는 인(仁)을 일컬어, 공자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여 ‘사랑을 바탕으로 삼은 조화된 정감에 의거한 덕’이라 하였고, 맹자는 본래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남의 불행을 좌시하지 못하는 동정심’의 발전이라고 하였다.
주자학에서는 ‘인이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이(理)다’라고 하였다. 인의 덕은 정의적(情意的)이어서 이지적(理智的)인 면을 보충하는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등의 덕목이 추가되어 오상(五常)의 덕이 되었다.
사람의 품성을 생각해 보았다.
대화중에 상대의 말을 곧잘 자르고 덤비는 이가 있다. 지극히 삼가야 할 행태다.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것이라면 서둘러 고쳐야 할 고약한 버릇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려면 내가 먼저 들을 줄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스스로 들을 줄 모르는 자가 어찌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상대방이 하는 말을 조용히 끝까지 듣고 있어 보라. 그러면 말을 하는 상대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가를 벌써 알아채기도 한다.
그래서 굳이 내가 말을 할 필요가 없도록 그 대답까지를 먼저 다 말하기도 한다. 말을 하면서 그는 가만히 듣고 있는 내 마음속을 다녀간 것이다.
체험해보라,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다. 이심전심이 생성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느 분을 만났다. 나는 잘 모르는 분인데, 우리 신문을 보고서 내가 아는 분을 통하여 식사 초대를 하여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유명인사가 아니다(그런데 아는 분은 다 알고 있다고 한다).
읍내의 한 식당에서 셋이 식사를 하였는데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분이었다. 그분은 말씀도 참 조용조용히 하는 분이었다. 소음 따위는 감히 끼어들지를 못하고 우리의 주위를 맴돌다 사라지곤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물 흐르듯이’ 라는 표현을 떠올렸었다.
말소리도 물 흐르듯이 모습도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을 쓰다듬고 적시며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말씀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다.
분위기에 젖어들며 듣고 있는 나도 조용해지고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었는데도 그랬다. 거대담론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연세 지긋한 분이 겸손하기도 했다. 겸손도 꾸며서 되는 일은 아니다. 과공비례(過恭非禮)도 다 꾸미는 데서 비롯된다. 진정성의 결여가 과공도 되고 비례도 되는 것이다
그분이 보여준 말수가 적은 모습은 침묵이 왜 금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고 진단하고 판단할 시간(여유)를 주는 것이 침묵이다.
웅변이란 감성을 자극하고, 호소하고, 설득하고, 종용하고, 윽박지르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는 것, 배려가 돋보이는 그보다 더 감동을 주는 장면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침묵은 금이고 웅변이 은인 것이다.
말수는 줄일수록 좋다. 말수를 줄이고 말을 덜 하자. 말속엔 거짓이 끼어들게 마련이고 그래서 말을 많이 하면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구도이다. 누구나 왕년에 집에다 금송아지 한 마리 매어놓지 않았던 사람 있는가. 금송아지얘긴 그 정도면 된다. 거기에 금송아지가 새끼 낳는 얘기라도 더 보태보라. 거짓말이 계속 새끼를 치도록 내버려두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말을 조심하는 것도 중요한 덕목이다. 말은 비수보다도 더 날카롭다. 말에 찔린 상처는 훨씬 더 깊고, 쉽게 치유되지도 않는다. 내가 하는 말도 낭중지추(囊中之錐)가 되어야 한다. 굳이 입에 담아서 말하지 않아도 뜻을 알아주게 되는 말로써.
내게 ‘물 흐르듯이’를 떠올리게 해준 그분은 별 말없이도 내게 참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당진신문, 곽인호 기자의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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