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때 교양으로 배웠던 <한국사> 과목을 가르쳤던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지긋이 드신 그 분은 한국사를 가르칠 때 과거의 역사적인 정보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를 리얼하게 재현해내는 '이야기'를 엮어가면서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또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기술이 탁월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정보 이면에 있는 야사들까지 동원해서 실감나게 이야기를 엮어갔기 때문에, 학생들로 하여금 흥미진진하게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호기심을 갖게 했지요. 그러니까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과 같이, 가령 통일신라 시대를 가르칠 때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로 엮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마치 그 <한국사 시간>이 흥미진진한 TV 드라마를 한 편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그 때 들었던 이야기들을 지금 하나도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시간 그 교수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야기 한국사>라는 이름으로 교과목을 개설한다면, 이 시대에도 충분히 인기가 있을 법한 훌륭한 교과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부쩍 Storytelling(이야기)이라는 개념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TV 리모콘을 누르다가 자칭 '최초의 이야기꾼 한의사'라면서 열강을 하고 있는 어느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지론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한의학의 세계를 알려주기 위해서 재미난 이야기를 엮어서 강의를 하는 건 자기가 처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지켜보다가 강의 속으로 빠져드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이야기의 마력이라고나 할까요.
광고 기법도 이제는 스토리텔링을 도입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저 제품을 더 많이 팔기위한 수단으로서의 광고가 아니라, 그 속에 '삶 속에서의 이야기'들이 녹아들게 하는 기법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최근 어느 광고 회사에서 가전 제품 광고를 만들면서, 가정에서 주로 그 제품을 사용하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UCC동영상으로 공모를 하여 그 생생한 화면을 이용, 광고를 만들었더니 반향도 크고 효과가 120%였다는 것입니다. 거실에 놀고 있는 아이가 엄마의 화장품 통을 꺼내서 얼굴에 다가 온통 바르면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장면, 또 휴지를 맘껏 풀어헤쳐놓고 쇼파 위에 올아가서 뒹구는 모습, 거실 바닥에 우유를 쏟아 놓고 온 몸으로 뒹굴면서 즐거워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마지막 멘트를, "그래도 네가 있어 우리가 행복하단다."라고 처리하는 방식의 광고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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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작동시켜서 인생의 이면에 있는 사연을 보고 듣게 하며, 우리 등 뒤에서 혹은 저 모퉁이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양상의 일들에도 우리를 참여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듣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이야기 속으로 자신이 자연스럽게 확장되어 참여하는 착각을 갖게 되고, 이해가 깊어질 뿐 아니라 상상력이 활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이야기'가 없으면 그저 형식만 남게 되고 질감이나 깊이가 없으며, 내면이 없는 종이 인형처럼 매마른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는 삶의 양념이며 조미료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끈의 역할을 하고 또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됩니다.
최근, 같은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어느 집사님께서 쓰신 수필집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대학에서 영문학(세익스피어)을 가르치셨고 이제는 정년퇴직 후, 그동안 모아 놓으셨던 자료들을 차근 차근 정리해 수필집을 내셨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집사님과는 매주 토요일 산행도 여러번 함께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던 사이여서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쓴 글들을 읽으면서 행간에 비친 집사님의 삶을 하나 하나 접하면서 내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그 분이 쓴 글을 통해서 비로소 그 분을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책을 다 읽은 후에, 그 집사님께 예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특별한 안부 전화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이야기를 엮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평소에 보지 못했고 또 듣지 못했던 사연들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놀랍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은 넘치지만 <자기 자신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없는 삭막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노력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야기를 엮어낼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1장 34절~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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