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독후감·책·영화·논평

[영화]워낭소리

석전碩田,제임스 2009. 2. 16. 17:46

퇴근 무렵 아내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아빠, 퇴근 후에 약속 있어? 시간이 괜찮으면 영화 한 프로 같이 보고 싶은데...."

문화생활과 관련해서 좀 처럼 먼저 제안하지 않는 아내가 권하는 영화. 무슨 영화길래 아내가 먼저 이렇게 나서는 걸까 짐짓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물었지요. "무슨 영환데?"

 아내가 말한 영화는 <워낭소리>였습니다.

 

사실, 주말 쯤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이 함께 봤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마음에 두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아내가 권하는 김에, 곧바로 예약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관은 밤 늦은 시간이라야 예약이 가능했지만, 이화여대 구내에 있는 ECC 영화관은 그런대로 여유가 있어 영화 감상에다가  아내와 함께 이대 교정을 걸으며 포근한 날씨를 즐기면서 데이트를 즐기는  보너스까지 누렸지요.

 

 

 

<워낭소리>는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PIFF)에 초청되어 다큐멘타리 부분 최우수상인 '피프 메세나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다큐멘타리 영화로서는 최초로 2009 선댄스 영화제 '월드 다큐멘타리 경쟁부문'에도 진출한 작품입니다. 그 영화제에서의 수상 여부와는 관계없이 해외 관객에게도 우리의 생생한 모습이 전해질 수 있다는 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흔 아홉살의 노인과 마흔 살이 다 된 늙은 소의 동행'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낸 이 영화는 다른 어떤 내레이션이나 설명도 없습니다. 그저 늙은 소 한마리를 중심으로 노 부부가 농삿일을 해가는 일상을 영상으로 담아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 영상들이 시종일관 가슴 따뜻하게 해 주는 마력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특히 영화를 보면서 내 마음 속에 계속 되뇌이는 화두는 '함께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귀가 어두운 늙은이가 불편한 소가 뒤척이면서 요롱소리를 낼 때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면을 화면에 담아 낸 감독의 마음이 엿보일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명절을 맞아 도회지로 나간 자녀들이 왁자지껄 몰려와 한바탕 만찬을 벌이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위한답시고 소를 팔아치고 농사도 이제 그만하라고 한마디씩 던질 때, 아버지는 그저 귀를 막고 있는 장면에서는, 진정으로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곱씹게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평생을 함께 살아 온 소의 우직함과 충직함.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때론 소가 불쌍해지기도 하고,  소가 먹을까봐 농약도 치지 않고 우직스럽게 고생하며 살아온 할아버지가 측은해지기도 합니다. 또 소와 할아버지 때문에 늘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던 할머니가 불쌍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내 할머니의 투정 속에서는 "할아버지가 죽고나면 눈치밥 먹으면서 도시에서 못살어. 나도 따라 죽을꺼야"라고 말하는 <함께 함의 뭉클한 감동>을 전달해 받게 되면서 '그래 바로 그거야.'라는 깨달음과 함께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장면으로 등장하는 우시장은 다름 아닌 아내의 고향인 경북 영주의 우시장이더군요.  사실, 경상도 촌놈으로서, 또 영화에서 나오는 그 장면들을 몸소 겪었던 한 사람으로서, <워낭소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제가 어릴적 영화가 찍힌 경북의 봉화나 영주 지방에서는 소 목에 달아 놓은 조그만 종을 <워낭>이라고 부르지 않고 <요롱>이라 불렀기 때문에 <요롱소리>라고 했으면 더 잘 전달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

 

저는 이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내가 일곱살  되던 어느 겨울,  나를 너무나도 사랑해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동구밖을 나서는 상여 행렬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상여에 매단 요롱 소리가 바로 "그 소리"처럼 들려왔으니까요. 인생의 마지막 길, 그리고 소의 마지막 길이 결국 요롱소리 울리며 스러져가는 같은 길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이야기해 주고 싶지는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입니다.

 

또 한 편의 수작(秀作)의 영화를 감상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배경음악은 Hear의 Alone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