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먹어도 개와는 안 먹는다

한.미 문화차이

석전碩田,제임스 2008. 8. 7. 17:18

유학생들 사이에서나 이민 간 사람들 사이에서나 미국생활과 한국생활의 차이를 논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 차이를한 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한국은 머리 아픈 곳’이고 ‘미국은 가슴아픈 곳’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한국은 정으로 사는 곳’이고 ‘미국은 합리적으로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한국에는 합리성이라는 것이 결여 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느낀다. 어찌 보면 법도, 원칙도, 논리도 없다. 그저 ‘서로 봐주며’ 살아간다. 그러니까 자연 서로 정을 나누며 살고 있으니 가슴은 따뜻할 수 밖에 없다. 또 가족, 일가, 친척, 많은 친지, 친구들과 정을 나누며 살 수 있으니 가슴이 저려오며 아플 리 없다. 한데 원칙없이 사니 도무지 골치가 아프기 짝이 없다.  가령,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자주 당한다. 학과에 무슨 일이 있어 결석하고도 출석으로 해 달라, 자원 봉사 관계 혹은 학생회 관계 일로 시험을 못 치렀으니 봐 줄 수 없느냐,  4학년인 데 취직해서 강의를 들을 수 없으니 좀 어찌 안되겠느냐 식의 부탁이다. 미국에서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경우이다.  또 교통 순경의 봐 주기, 혹은 다른 위반자는 다 보내고 하나만 잡아놓고 딱지 떼기 따위는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너무 원칙대로 하니 참으로 딱하고 분한 경우가 없지 않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무리 가까운 이웃끼리라도 옆집에서 개를 풀어 놓으면 당장 고발이다. 각자의 문제는 각자의 문제일 뿐 같이 염려하며 감정을 나누려 들지 않는다. 단지 합리적인 차원에서만 처리할 뿐이다. 미국사회에서는 결코 ‘봐달라’는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통수의 사회도 아니다.  이 방법으로는 안되지만 저 방법으로는 될 수 있다. 

 

가령 유학 초기에 영어가 부족해서 시험 때 시간이 더 필요하면 그것은 수용이 된다. 그 시험이 어느 분야의 지식에 관한 시험이지 영어시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기말 논문(term paper)을 제출할 때에도 처음부터 교수에게 계속 묻고 도움을 청해도 된다. 단지 약속하고 만나야 하고 학생 자신이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중의 문제 해결의 경우에 한해서이다. 합리적인 차원에서 얼마든지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 합리적 차원에서 벗어나면 그만이다. 돈이 없어서 일해야 하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 공부를 많이 못했으니 좀 고려해달라고 한다면 미국인 교수 열이면 열이 다 공부나 일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충고할 것이다. 직접 관련 없는 것을 가지고 ‘사정’하는 것은 오히려 역겨움을 야기하여 피해만 보게 될 뿐이다. 미국은 한마디로 합리적인 사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골치 아픈 것은 없으나 재미는 없는 사회이다. 한국사회는 정적인 사회이므로 잔재미는 있으나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골치아픈 곳이다. 그래서 재미 수필가 김옥교는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이라고 했던가?

 

미국과 한국사회는 종교적 배경이 다른 것도 문화적 특성의 하나다. 미국의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다. 기독교문화의 기본은 사랑이다. 특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모금을 주는 실천적 사랑’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약자를 돕는 것을 가장 큰 종교적 덕목으로 삼고 있다.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을 돕는다. 외국 고아들을 입양하고, 지체 장애아들을 극진히 돌보는 것이 미국인들이다. 한편 한국은 불교와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이다. 군사부일체라고 하여 윗 사람 공경을 가장 가치있는 인륜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살을 잘라내어 부모님에게 공양하는 옛 이야기에 우리는 감격하지만 놀라지 않는다. 자신의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자신도 임금을 위해 장렬한 죽음을 택한 계백 장군을 우리는 흠모한다. 미국인에게 그런 얘길 해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의 종교적 문화는 불쌍한 자 돕기보다는 윗사람 공경이 더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야 복받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농경문화까지 합쳐 실천적 신앙보다는 기복적 신앙에 더 깊이 물들어져 있다. 미국인들의 종교적 자세는 실천적이다. 봐도 못본 체 하는 태도가 아니라 옳은 줄 알면 곧 실천하는 태도가 미국인들의 종교적 태도이다.  춘향전을 읽은 한 미국 친구의 첫 반응은 “변사또에게 춘향이 당하고 있을 때 동네 청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는 것이었다. 자연히 이들이 추구하는 삶의 덕목은 정직(honesty), 용기(courage),공평(fairness), 꾸준함(persistence)등이고 비겁함, 불공평, 거짓, 바보(stupidity) 등이 제일 싫어하는 개념들이다. 서부 영화에서 흔히 “You are a liar." 혹은 "You are a coward."하면 상대방이 권총을 뽑는 장면을 본다. 다 이들의 종교적 덕목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체면치레 혹은 명분만 있다면 거짓말은 오히려 미덕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볼 때 그 차이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밥을 안 먹었어도 먹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미국인 사회에서 이러한 태도는 안 통한다. 솔직하고 적선적인 태도가 환영받는다. 내가 만난 어떤 미국인 교수는 동양학생들을 만나면 답답하다고 하면서 어떤 때는 아주 싫기조차 하다고 하였다.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표현하지 않고 빙빙 돌리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그 저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솔직한 것은 무례에 속하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차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솔직함이 예의 없는 솔직함이 아니다. 가령, 식사 초대를 받은 경우, 음식이 맛이 없어도 ‘솔직히’ 맛없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먹는 그들이다. 단지, 우리 사회는 그저 수양하여 희로애락의 감정을 극복하는 즉, 점잖음을 추구하는사회요, 미국사회는자신을분명히(straightforward) 표현하는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사회로 그 차이를 이해하면 될 것이다. 두 사회의 이러한 차이는 종교적 차이에 기인된 문화적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학적 측면에서도 두 문화의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한국인의 선조가 농경민임에 반해 미국인의 선조는 유목민이었다. 농경민의 입장은 한 곳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고 농사의 성패를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씨 뿌리고 김매고 하는 일 외에 햇볕 나고 비오고 하는 것은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자연 기우제를 드린다든가, 태풍의 피해를 막아달라고 기원하고, 애타게 햇볕을 간구하는 기복적 신앙에로 접근하게 되었다. 고로 나의 능력은 아무 것도 아니고 그저 운에 맡기고 신에게 의존하는 형으로 사고가 형성되어 왔다.  반면에 유목민의 입장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목초지를 찾아 나서야 하고, 보다 좋은 곳을 찾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달려 있었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고, 성패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들의 기본 자세였다. 이러한 인류학적 차이를 학문적 술어로는 각각 외성화(externalization) 내성화(internalization)라고 하는데, 외적인 요인에 성패의 이유를 돌리는 유형을 외성형(external)이라고 하고 성패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유형을 내성형(internal)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류학적 배경에서 오는 외성형 내성형의 차이는 지금도 두 문화의 차이로 남아있다. 우리 스스로를 보자. 가령, 시험성적이 나쁠 때 자신의 준비 부족을 탓하기보다는 ‘문제가 어려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주팔자가 나빠서 못산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사고가 나면 상대방 잘못이거나 재수가 없어서이지 내 잘못은 없다. 모든 결과에 대한 원인을 나 이외의 것에서 찾는다. 심지어는 까마귀가 울어서 재수 없다고까지 여긴다. 내 자신이 범죄자가 된 것은 사회 탓이지, 결코 내 탓은 아닌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학생들은 ‘차가 안 와서 늦고’,‘집에 일이 있어서 시험을 못 보았고’,‘누나가 시집가서 결석했고’.‘취직해서 공부할 새가 없고’ 등등의 생각을 가지고 변명하고 스스로를 책임질 줄 모른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또 그런 핑계가 인정되는 곳이 우리 사회다. 이러한 태도는 미국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결코 핑계대지 않는다. 관계없는(irrelevant)사실을 끌어들여 변명하지 않는다, 계획을 바꾼다든가 할 때, 긴 변명보다는 그저 “I changed my mind”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표현이다. 이와 같이 미국 문화는 내성화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사회 특히 백인사회에서는 스스로 노력하고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지는 태도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은 이민으로 이루어진 복수사회다.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한다. 학교에서 토론에 참여해 보면 이 특성이 잘 나타난다. 정답이란 없다. 논리적이기만 하면 어느 답도 맞는다. 남의 의사를 존중하고 인정한다. 획일적이거나 단일성을 추구하는 문화(melting pot)가 아니라 모든 개체가 살아 있으면서 화합을 이루는 문화 (salad bowl)를 추구하는 것이 미국사회다. 이러한 면이 지나쳐 극히 개인적인 사회이기도 하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도움도 물어보고 베푼다. 그냥 도와주면 도움 받는 쪽도 싫어한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표현 중의 하나가 "May I help you?"이고 적은 도움이라도 받으면 받드시 "Thank you."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미국사회의 개인주의는 남을 생각하는 이타적 개인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남이야 어찌되든 나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이기적 개인주의와는 대조적이다.

 

미국인들의 준법정신 또한 뛰어나고 법 시행의 행정력 또한 두려울 정도다. 어디서나 줄서서 차례대로 하기, 시간 지키기, 교통질서 지키기 등은 그들의 몸에 밴 생활태도이다. 가령, 바닷가에서 게를 잡거나 조개를 캐며 즐길 수 있는데 규정은 6인치 이상의 것만 잡도록 되어 있다. 이 규정을 어기는 미국인, 특히 백인은 없다. 혹 누가 어기면 수만 명중에서도 이를 잡아 낸다.  가령 취수원 저수지에 들어가면 수분 내에 감독관이 나타난다.이렇게 행정력이 강해서 법을 지키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미국인들에게는 준법정신이 몸에 배어있다. 또 지킬수 있는 법이 제정되어 있는것도 사실이다. 준법정신은 공공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초가 된다. 따라서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사회지만 시민들의 준법정신으로 말미암아 성공적인 공동사회를 이루고 있다. 철저한 준법정신과 더불어 의무와 권리의 구별 또한 분명하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라도 잘못하면 ‘봐주지’않고 법에 호소한다. 양보를 잘하는 이들이지만 불법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불법으로 끼여드는 차에게도 ‘양보’하는 우리사회지만, 이런 경우의 ‘양보’는 양보가 아니라 ‘강탈당하는 것’으로 여겨 절대 용납하지 않는것이 미국인들이다. 이웃사촌을 내세우는 감정적 집단의식이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의무와 권리의 행사를 분명히 하는 이 준법정신의 결여가 공공의식의 부족을 초래하고 결국 같이 사는 공동 사회형성에 어려움을 겪게 한다.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직업의식이다. 직장에 있는 시간은 돈 받고 일하는 시간이므로 철저히 직장을 위해 쓴다.  가령,  출근해서 신문보고, 차 마시고, 점심 먹고, 목욕하는 등등의 태도는 있을 수 없다. 철저히 일하고 또 직업을 통해 봉사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직업의식에서 나온다. 유학시절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때에 느낀 것이다. 처음, 내가 움직이지도 못할 때의 간호원들의 도움은 어느 가족보다도 친절하고 헌신적이었다. 하나 차차 나아감에 따라 도움은 차차 줄어든다. ‘네가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아마, 우리나라의 병원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친절해 질 것이다. 점점 친해지기 때문에. 나는 미국의 교육 현실에서도 직업의식에 투철한 교사들을 목격하였다. 같은 과목을 수강한 초등학교 교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공과 관계없는 중국어 과목을 수강하며 어려워 하고 있었다. 그래 그 어려운 중국어는 왜 배우려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자기 반에 새로 중국에서 이민 온 아이가 들어왔는데 아이가 들어왔는데 영어를 전혀 못해 의사소통이 안 되어 할 수 없이 자신이 중국어를 배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또 한 경우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주말이면 젊은 미국여인이 늘 와서 어린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심지어는 말이 되어 아이들을 태워주며 노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어린이들의 담임교사였다. 우선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그런 희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정상적인 미국인들의 직업적 태도이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생각도 다르다. 미국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너도 남과 같다.” 용기를 주며 가르친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너는 남과 달라야 한다.” 며 우월감을 심어 주려 든다. 미국 교육은 창조성을 강조한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 아닌, 찾아보고, 생각하고, 발견하는 창조적 교육이다. 토론에 정답은 없다.

 

나는 유학 시절 첫 시험 때 교과서 내용을 열심히 암기해서 썼다. 교수의 평은 냉혹하게도 "이것은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다. 네 생각을 써라."였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선다형 문제가 있을 때 모른다고 칸을 남겨 놓지 않는다.  어디엔가 '찍어서' 정답 표시를 하는 것이다.  미국 어린이들은 모르는 건 표시하지 않는다.  짐작해서라도(academic guess) 다 표시하라고 하기 전엔.

 

이와 같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 상의 특징에는 아주 구체적인 것도 많다. 우리의 것과는 아주 다르다.  미국인들은 낯선 사람도 길에서 만나면 웃고 인사하고 지나친다.  그러나 서로 수많이 인사를 했더라도 개인적 질문은 하지 않는다.  어디서 왔느냐, 결혼했느냐, 몃 살이냐 등의 질문은 금물이다.  도 대화 중엔 반드시 상대의 눈을 보아야 한다(eye contact). 아이들이 꾸중을 들을 때 어른의 눈을 보지 않으면 더 큰 꾸중을 듣는다.  남녀가 대화할 때 여자가 남자의 눈을 쳐다 보지 않으면 음흉한 여자로 취급 받는다.  앉음새도 여자들의 옳은 자세는 다리를 겹치고 앉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버릇없는' 자세이다. 된장, 마늘, 김치 냄새를 싫어하고 치즈 냄새에 익숙하다.  체취에 관한 이해도 다르다.  미국인들은 우리보다 상호 거리를 넓게 갖는다.  여학생들끼리 손잡고 다니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예사이나 미국에서는 동성 연애자로 취급 받을 수 있다.  식물도, 동물도 각가 나름대로의 거리를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사람도 그러하되 문화에 따라 그 거리의 장단이 다르다.

 

지구 위의 모든 사회가 함께 서로 연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것을 지키는 것 또한 귀중하다.  하나, 우리 것을 지키되 고집스럽게 옛 것을 그대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것을 현재와 미래에 맞게 승화하여 보존해야 빛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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