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 이영광
안경을 잊어버리고 출근하였다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간밤 취해서 부딪혔던 골목 귀퉁이가
각(角)을 잃고 편안히 졸고 있는 걸 보고 발길을 돌렸다
길이 뿌옇게 흐렸으므로 무단횡단도 하지 않았다
나의 약시가 담 모서리의 적의를 용서한 덕분일까
새 학기 들어 처음 흡족하게 강의를 마쳤다
미운 놈 고운 놈 제각각이던
학생들도 모두 둥글둥글 예뻐 보이고
오늘따라 귀를 쫑긋 세우고 열중하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창밖을 내다보니
황사 며칠, 서울도 그럭저럭 봐 줄 만 하다
흐릿해진 풍경 어딘가에 봄 내음이 스며
조용조용 연둣빛으로 옮겨내는 중이다
나는 세상을 너무 자세히 보려 했던 모양이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어딘가로 번져가는 중이기에
수묵 같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에
안경 도수가 높아갈수록 모든 것은 자취를 감추고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두웠던 눈에 봄이 처음
연둣빛 투명한 안경을 씌워준 날, 봄날
-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2003)
* 감상 : 이영광 시인. 교수.

1965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지도에도 나온 적 없는’ 벽촌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고 안동에서 성장했습니다.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미당(未堂)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8년 계간지 <문예 중앙>에 ‘빙폭’ 등 9편의 시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2003),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재판, 문예중앙, 2011), <아픈 천국>(창비, 2010), <나무는 간다>(창비, 2013),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 <해를 오래 바라보았다>(아시아, 2019),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현대문학, 2020), <살 것만 같던 마음>(창비, 2024) 등이 있습니다.
2008년에는 <노작 문학상>을, 2011년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기리는 11회 <지훈상>과 11회 <미당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했고, 2024년 <백석문학상>과 <형평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015년부터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문화창의학부 미디어문예창작전공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무언가를 잊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분명 손에 들고 있었던 물건을 찾지 못하고, 운동 후 샤워 도구를 들고 샤워장에 들어서서야 비누를 새로 가져왔어야 했던 사실이 생각나고, 하려던 말을 놓쳐버리는 순간들, 또 지하철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타지를 않나 자칭 똑똑한 척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영 아닌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먼저 나옵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영광의 시에서 시인도 이렇게 연초록빛 좋은 봄날, 출근길에 안경을 깜빡 두고 집을 나왔나 봅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세상이 걱정되어 다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지난밤 취기에 부딪혔던 골목 귀퉁이가 전보다 무뎌진 모습으로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포기하고 발길을 돌립니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는 불편함보다 오히려 낯선 여유와 부드러움으로 채워졌고 근사한 시 한 편을 길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또렷하게 보이지 않기에 세상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한결 둥글어 보이고, 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도 그저 비슷하게 따뜻한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순간들이, 흐릿한 시선 덕분에 오히려 더 깊이 스며듭니다. 선명함이 주는 정확함 대신, 흐릿함이 주는 관용과 여백이 시인의 하루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늘 더 잘 보려고 애씁니다. 더 정확히 판단하고, 더 분명하게 구분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오히려 너무 또렷하게 보려 했기 때문에 놓치고 있었던 것들이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어딘가로 번져가는 중이기에 / 수묵 같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에' 시인은 살아 있는 것들은 본래 경계가 흐리고, 서로 번져가며 존재하기에, 지나치게 선명한 시선은 그 미묘한 결을 오히려 지워버릴지도 모른다고 노래합니다. 안경을 벗은 하루는 불편함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열어준 시간이었다는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시인은 그 흐릿한 세계 속에서 연초록 봄을 발견했습니다. 어두웠던 눈에 연둣빛 안경이 씌워진 것처럼, 세상이 다시 부드럽게 살아나는 봄날의 순간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봄이 한창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젖히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연초록 봄 단풍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신록예찬(新祿禮讚)'이라는 수필의 제목이 아니더라도 이즈음의 연초록빛 황홀함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즈음에 읽기에 딱 맞는 시로 '숲'이란 시를 한 편 더 소개합니다.
숲
-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有心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 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子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통과시켜주고도 제 자리에,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 시집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
이 시는 ‘봄날’에서 시작된 시선의 변화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한층 더 깊이 보여주는 시입니다. ‘봄날’이 흐릿함 속에서 세상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면, ‘숲’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받아들인다는 것, 껴안는다는 것의 본질을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빈틈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지나가게 하는 통로입니다. 바람도, 사람도, 소리도, 시간도, 그 사이를 통과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구멍 숭숭 난 숲’이라 표현하면서도, 그 숲이야말로 온전히 제 자리에 서 있는 존재라고 노래합니다. 생각해 보면 ‘봄날’에서 시인이 안경을 벗고 마주한 세계 역시 이와 닮아있었습니다. 또렷하게 구분하고 재단하려 했던 시선 대신, 흐릿하게 번져가는 상태를 받아들이자 비로소 세상이 둥글어지고, 따뜻해지고, 살아 있는 것들의 결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숲’에서는 그 ‘번져감’을 한층 더 확장해, 서로를 통과시키며 독립적이지만 서로 껴안고 존재하는 삶의 방식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결국 두 편의 시(詩)는 같은 이야기를 다른 깊이에서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흐릿해져도 괜찮다는 것, 조금 비워두어도 괜찮다는 것, 그래야 비로소 세상과 사람이 우리 안을 지나갈 수 있다는 것.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이 봄날에, 우리는 너무 또렷하려 애쓰기보다 조금은 흐릿한 눈으로, 조금은 빈틈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그때 비로소, 연둣빛으로 번져오던 봄이 우리 안에도 조용히 스며들어 하나의 ‘숲’처럼 깊어지고 넓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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