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농장
- 고찬규
참 용하기도 하지
씨앗만 뿌려 놓으면
어떻게 그렇게 닮은 것들이
목을 빼고 고개를 쳐드는지
시금치를 닮고 쑥갓을 닮고 옥수수를 닮은 것들로
주말에나 가는 주말농장은
주말이면 풀밭이 돼 있다
땅에서 막 올라온 것들
그 구분이 마냥 쉬울 수만은 없는데
농장지기 '아먼 늙으먼 죽어야재 할매'는
참 재주도 좋다
나이 먹으니 아무것도 뵈는 게 없다더니
눈은 손끝으로 옮겨 간 게지
용케도 풀만 쏙쏙 뽑아내는데
입도 쉬지 않고 놀리는 것인데
끌끌 혀를 차며 젊은것들 어쩌고 하시는 데는
내 뿌리까지 뽑히는 것만 같았지
봄바람이 네 뿌리를 보여 달라고 할 때
햇살은 혀를 내밀며 헤헤거리고
막걸리 한 사발과 나는
먼 산이나 바라보며 딴청이고
- <문학사상>(2008년 6월호)
- 시집 <핑퐁핑퐁>(파란, 2016)
* 감상 : 고찬규 시인, 출판인.

1969년 전라북도 부안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문학동네, 2004), <핑퐁핑퐁>(파란, 2016), <꽃은 피어서 말하고 잎은 지면서 말한다>(걷는 사람, 2023) 등이 있습니다.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경희문학상(2017)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시 창작 강의, 현재는 서대문구 탁구협회장과 도서출판 해토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이 시는 도시인들의 로망인 주말농장의 소박한 풍경을 그린 듯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꽤 매서운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씨앗만 뿌려놓으면 '닮은 것들'이 올라오긴 하지만, 주말에만 찾는 밭은 금세 '풀밭'이 되어버리지요. 이 장면은 단순히 농사의 어려움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간헐적인 관심’으로는 생명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은근히 꼬집습니다. 돌봄에는 꾸준함이 필요하다는, 너무 당연하지만 자주 잊는 진실을 환기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할매’의 존재는 시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아먼 늙으먼 죽어야재'라며 스스로를 낮추지만, 정작 시적 화자가 붙여 준 어엿한 그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손끝으로 풀과 작물을 구분해 내는 내공(內功)이 탄탄한 사람입니다. 눈이 아니라 몸으로, 세월로 익힌 감각이지요. 도시의 ‘주말 농부’가 흉내 낼 수 없는 깊이가 여기 있습니다. 특히 '눈은 손끝으로 옮겨 간 게지'라는 표현은, 나이 듦을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지혜로 전환시키는 아름다운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건, 화자가 느끼는 불편함입니다. 할매의 잔소리를 들으며 '내 뿌리까지 뽑히는 것만 같았지'라고 고백하는 대목은, 단순한 농사 이야기를 넘어섭니다. 풀을 뽑는 행위가 곧 ‘사람을 가려내는 일’, 혹은 ‘삶의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일’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자라고 있고, 무엇과 섞여 살아가고 있는지, 그 질문이 은근히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봄바람이 '네 뿌리를 보여 달라'고 할 때, 화자는 막걸리 한 사발을 들고 먼 산을 바라봅니다. 뿌리를 드러내는 일, 자신의 근원과 직면하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고백처럼 읽힙니다. 햇살은 '헤헤거리'고, 자연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데, 사람만 딴청을 피우고 있는 셈입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주말농장’은 더 이상 취미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거울처럼 다가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삶을 ‘주말처럼’ 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 안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 닿아 있는지 조용히 묻게 됩니다.
최근 저는 뜻깊은 인연으로 고찬규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부터 서대문구 탁구협회장을 맡게 되셨으니, 내가 맡고 있는 배드민턴 협회장과는 가장 가까운 '이웃 종목'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시를 쓰는 문학인이자, 탁구를 생활처럼 즐기며 결국 한 구(區)의 협회를 이끄는 자리까지 맡게 된 열정적인 생활 체육인인 그는 탁구와 관련된 잡지 <탁구 춘추>를 직접 발행하는 발행인으로서, 한 분야를 깊이 사랑하는 꾸준함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의 시선, 공을 주고받는 사람의 호흡은 어딘가 닮았습니다. 순간을 읽고 흐름을 타며 리듬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시인이 탁구를 즐긴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의 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단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탁구라는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으면서도, 탁구의 감각을 은근히 품고 있는 듯한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핑퐁어학원 어느 시인의 혼잣말
-그리하여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
- 고찬규
무릇 시인이라면
예쁜 연애시 한 편쯤은 가져야
제대로 된 시인인 게지
넝마 걸친 시인의 평소 지론이자 시시한 시론인데
입이 바쁘고 말로만 시를 쓰니
변변한 시 한 편 갖지 못했음이 자명하다
불혹의 나이에
새삼스레 말(言)을 다시 배워 보겠다고 등록한
핑퐁어학원에 첫 등원하는 날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주춤주춤하는데
먼저 눈인사를 건네는 아낙이 있는 것이다
오, 삐까번쩍!
넝마주이 시인은
첫눈에, 딱!
눈웃음이 하도 예뻐서
핑퐁핑퐁 눈길이 오가다 보면
시 한 편 얻을 것만 같았지
비로소 제대로 시인이 될 것 같았지
하!
시 쓰기는 콩깍지 씌우기
시 쓰기는 콩깍지 벗기기를
하루 이틀 사흘
하하!
작심삼일 언감생심
이내 깨달음이라니
남루하고 누추하여라
어느 세월에 말은 배워 시를 쓰시나
예술은 눈웃음이 예술이라며
진흙 속에 뒹구는 심사
언제쯤 연꽃 한 송이 밀어 올릴까나
그럴듯한 연애시 한 편쯤은 가져야 시인인 게지
그렇지, 무릇 시인이라면
* 註 : 장석남 시형에게 빌려 쓰다.
- 시집 <핑퐁 핑퐁>(파란, 2016)
이 시는 '무릇 시인이라면' 한 편의 ‘연애시' 정도는 가져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시작하지만, 읽다 보면 그보다 더 깊은 자기 성찰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무릇 시인이라면'이라는 다소 허세 섞인 표현은 이 시의 마지막 문장뿐 아니라 중간중간 변주된 표현으로 등장하며 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표현에서는 사실 아직 한 편의 온전한 시도 갖지 못한 자신의 빈손을 드러내는 고백을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핑퐁어학원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움의 장소를 넘어, 마음과 시선이 오가는 ‘탁구대’ 같은 은유로 읽힙니다. 눈웃음을 주고받는 순간의 설렘은 마치 랠리처럼 이어지고, 그 안에서 시 한 편이 탄생할 것 같은 기대가 피어오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곧 깨닫습니다. 시 쓰기는 단순한 감정의 콩깍지를 씌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벗겨내는 고된 과정도 반복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예술은 눈웃음이 예술이라며'라는 구절에서는, 결국 시란 거창한 언어 이전에 순간의 떨림과 감각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조차 쉽게 작품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시인은 다시 ‘넝마 걸친’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이 시의 매력은 바로 그 솔직함에 있습니다. 시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마음, 그러나 번번이 미끄러지는 인간적인 모습이 유머와 자조 속에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반복되는 구절 - '무릇 시인이라면' - 은 더 이상 허세가 아니라, 여전히 시를 꿈꾸는 한 시인의 소박한 다짐처럼 들립니다. 어쩌면 이 시는 완성된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한 편의 시임을 보여주는 작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를 향해, 또 삶을 향해 공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문득 그가 즐겨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탁구공처럼 어디론가 튀겠지. 그러다 멈추기도 하겠지.” 어쩌면 우리의 인연도, 그리고 각자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로 튈지 몰라 더 살아 있게 하고, 때로는 멈춤 속에서 제 자리를 돌아보게 되는 것. 그런 리듬 속에서 이어진 이 인연 또한, 제 삶 한켠에서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으로 머물 것 같습니다. - 석전(碩田)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빠 생각 - 최순애 / 고향의 봄 - 이윈수 (0) | 2026.05.06 |
|---|---|
| 봄날 / 숲 - 이영광 (0) | 2026.04.29 |
| 봄날 정경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 김이듬 (1) | 2026.04.15 |
| 줏대 없는 사람 / 13인의 대법관에게 고함 - 김주대 (1) | 2026.04.08 |
| 배론 / 오류동 3 - 권명옥 (0) | 2026.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