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배론 / 오류동 3 - 권명옥

석전碩田,제임스 2026. 4. 1. 06:00

배론

- 권명옥

성지 聖地 배론은
여름 저녁 나절 감나무 서늘한 그늘 아래 앉으신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애띤 슬픈 여인
무릎에
장년 壯年한 늙은 아들의 시신 屍身을 안아 누이시고 하염없이 또

사(赦)하시다.

- 시집 <南 向>(열화당, 2004)

* 감상 : 권명옥(權命玉) 시인.

1941년 강원도 강릉(명주군 연곡면 퇴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강릉상고, 한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74년 월간 <심상(心象)>에 ‘오류동1’, ‘오류동 2’, ‘오류동 3’ 등의 시를 발표,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강릉 상고 교사, 동대문상고 교사, 문교부 편수국 편수사, 강릉 간호전문대 교수를 거쳐, 1991년부터 세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 2006년 정년퇴직하였습니다. 2013년 3월 10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향년 72세로 별세하였습니다.

명옥 시인은 평생 쓴 시 가운데 43편만을 골라, 등단 30년 만에 시집 <南 向> 한 권만을 세상에 남긴 시인입니다. 스스로 ‘쓰레기로 범람하는 시집 홍수 속에 시집 한 권을 더하는 일이 송구스럽다’고 말할 만큼, 그는 끝까지 시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난주, 이건청 시인이 박목월 시인의 기일을 맞아 용인 공원묘지를 찾았다가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친구 권명옥 시인의 묘소에도 들른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남겼습니다. 따뜻한 봄날, 스승과 벗을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그 차분한 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번 주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로 이 시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번 주말, 해마다 이어온 성묘를 앞두고 있던 터라, 이즈음에 묘소를 찾은 그의 이야기가 더욱 깊이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순절의 끝자락, 고난 주간의 수요일 아침입니다. 조용히 하루를 열며 권명옥의 ‘배론’을 읽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여름 저녁, 감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아직 스물을 갓 넘긴 듯한, 너무도 젊고 애띤 얼굴. 그러나 그 무릎 위에는 ‘늙은 아들’의 시신이 놓여 있습니다. 그 뒤틀린 시간의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멈춥니다.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머니는 젊고, 아들은 늙었습니다. 생의 순서가 무너진 자리에서, 시인은 단순한 한 장면이 아니라 오랜 고통의 시간을 끌어안고 있는 신앙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릴 수 있는 ‘피에타’의 형상처럼, 슬픔과 사랑이 동시에 깃든 침묵의 기도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여인은 그저 울고만 있지 않습니다.

‘하염없이 또 // 사(赦)하시다.’

축과 절제, 배제의 미가 담긴 이 한 줄이 지금까지의 장면을 단숨에 바꾸어 놓습니다. 슬픔은 끝내 원망으로 흐르지 않고, 용서로 나아갑니다. 이유를 묻지 않고, 대상을 가리지도 않은 채, 그저 다시, 또다시 용서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고난 주간이 우리에게 조용히 건네는 가장 깊은 언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배론이 순교의 땅이라면, 이 시는 그 순교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고통을 되새기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고통을 넘어서는 사랑의 자리까지 나아가는 일. 그리고 마침내,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끌어안고 용서하는 마음 말입니다.

늘 아침 이 시를 읽으며 오래 여운으로 남는 것은 한 자 한 자에 스며 있는 간결한 말의 리듬에서 우러나오는 힘입니다. '하염없이 또 // 사(赦)하시다' 오늘 하루, 붙들어야 할 말도 어쩌면 이것 하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명옥 시인의 시 가운데, ‘배론’이 바깥의 성지를 향하고 있다면, 우리의 시선을 안쪽으로 이끄는 시가 있습니다. 그의 등단작 중 하나인 ‘오류동 3’입니다.

오류동 梧柳洞‧3
- Karl Barth에게

- 권명옥

첫눈 온 이 아침 바울이 보낸 편지를 읽으며
아, 내가 그를 저버렸음을, 저버렸음을.
내 반생 半生의 하루 하루는
간밤 내 서걱거린 댓잎 같은 푸른 뉘우침에 찔리고
찔려
어딘가, 외등 外燈 밝힌 어둠 속
한 조각 넝마로 뒹굴고
뒹굴고
뒹굴다가 첫눈 온 이 아침 햇빛에 깨어서도
내 눈에 바람 안은 대밭소리를 내며 내린다.
내가 혹은 모짜르트를 들으며
칼 바르트, 당신의 이승의 아침에 깨어날라치면
바람 잔 대밭
첫눈의 흰빛이 속삭이는 아버지의 말씀,
나는 한 번씩
문 門 안쪽에서 날아오는 물까치 두세 마리에도
한눈을 판다.

- 시집 <南 向>(열화당, 2004)

일 아침 펼쳐 드는 성경, 이 시를 건져 올린 날에는 바울 서신을 읽고 난 뒤, 시인은 더 이상 확신에 찬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평생을 믿어왔다고 고백하면서도, 끝내 떠오르는 것은 흔들림과 배반, 그리고 뒤늦은 뉘우침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마치 칼 바르트에게 편지를 쓰듯, 조용히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까. 이렇게 무너지고 다시 돌아오는 것뿐인 이 반복이, 과연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물음은 차분하지만, 그 속은 거의 절규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두 시를 나란히 놓고 다시 바라보면,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배론'에서 끝내 용서를 멈추지 않던 그 여인의 모습은, 어쩌면 바로 이러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흔들리고, 저버리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 완전하지 못한 채로 믿음을 붙들고 있는 사람. 그래서 시인의 고백은 무너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무너짐이야말로, 용서가 필요한 자리이며, 동시에 이미 용서가 시작된 자리임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난 주간의 수요일 아침, 우리는 완전한 신앙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눈팔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고개를 드는 일,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또 // 사(赦)하시는’ 사랑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늘도 우리는 그 두 자리 사이를 오갑니다. 무너짐과 용서 사이를.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