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사청사우(乍晴乍雨) - 김시습

석전碩田,제임스 2026. 3. 18. 06:00

사청사우(乍晴乍雨)
개었다가 다시 또 비 내리네

- 김시습

乍晴乍雨雨還晴 (사청사우우환청)
天道猶然況世情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예아변시환훼아)
逃名却自爲求名 (도명각자위구명)
花開花謝春何管 (화개화사춘하관)
雲去雲來山不爭 (운거운래산부쟁)
寄語世人須記認 (기어세인수기인)
取歡無處得平生 (취환무처득평생)

잠시 개었다, 비 내리는가 하면 다시 개니,
하늘도 이러한데 하물며 세상의 인심임에랴.
나를 기리던 사람이 문득 나를 헐뜯고
명예를 피해 다니던 사람이 공명 찾아 헤매이네
꽃이야 피든 지든 봄이야 무슨 상관
구름이 오고 가도 산이야 다툴리가
세상 사람들아 모름지기 알아두소,
평생토록 기쁨 얻을 곳 없도다.

乍 : 갑자기
便 : 문득
却 : 도리어
花謝 : 꽃이 지다
奇語 : 기억하게 말한다

* 감상 : 김시습(金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峯),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설잠(雪岑) 등이며, 1435년 서울 한성에서 태어난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불교 승려이자 문인(시인)입니다. 1493년 향년 58세로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습니다.

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며칠 전 관람했습니다. 지난 주말 기준으로 벌써 1천2백만 명을 돌파했다고 하니 참 대단한 기록을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어린 왕 ‘단종’의 비극적인 운명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살았던 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바로 천재 문인(시인)이자 방랑 승(僧)이었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입니다.

알려진대로 단종은 숙부였던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젊은 유학자 김시습은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세상의 도리가 무너졌다고 여긴 그는 벼슬길을 버리고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전국을 떠돌며 긴 방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방랑길에서 그가 충청도 계룡산 ‘동학사’에 머물고 있을 때, 그곳에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강원도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를 직접 만났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가면 서무(西廡)의 사육신 위패와 함께 동무(東廡)에는 엄흥도의 위패도 모셔져 있는 이유입니다.

방랑의 시간 속에서 그는 조선 최초의 한문 소설집이라 불리는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남겼습니다. 그가 경주 남산의 한 봉우리인 금오산(金鰲山)에 칩거하면서 쓴 이 책에는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다섯 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울부짖으며 반항하는 폭력이나 자포자기를 택한 것이 아니라, 붓을 들고 속에서 분출되는 울분을 글과 시로 풀어내며 기록하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오신화를 완성한 후에도 그는 곧바로 세상에 내놓지 않고 깊이 숨겨 보관해 두었습니다. 올바른 말을 해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적으로 몰리는 어그러진 시대였으니 말입니다.

오신화 속에는 절에서 만난 여인과의 기이(奇異)한 인연을 그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죽음을 넘어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옛 궁궐에서 만난 신비한 여인을 만나 시를 주고 받은 이야기를 다룬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에 초대되어 겪는 기이한 체험을 담은‘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그리고 저승 세계를 여행하며 인간 세상을 돌아보는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다섯 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으로 보면 이 이야기들은 귀신과 용궁, 신비한 만남이 등장하는 전기(傳奇) 소설입니다. 그러나 다섯 편을 차례로 읽다 보면 하나의 공통된 정서가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 세상에서 사람의 힘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그리고 결국 현실 바깥의 세계에서야 겨우 위로를 얻는 숙명적인 인간의 나약함 등을 그린 것입니다. 젊은 유학자 김시습이 바라본 이미 무너진 세상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은 쫓겨나고 충성은 죄가 되어버린 시대 말입니다. 말을 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가 선택했던 삶은, 시(문학)라는 도구를 통해서 마음껏 답답한 속마음을 풀어내 민중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주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늘 감상하는 그의 시 ‘사청사우(乍晴乍雨)’는 바로 이런 그의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잠시 하늘이 갠다 싶으면 이내 비가 내리고, 비가 그치면 또다시 맑아집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늘의 날씨도 이처럼 변덕스러운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인심이야 어떻겠느냐고. 어제는 나를 칭찬하던 사람이 오늘은 나를 헐뜯고, 명예를 피하겠다던 사람이 어느새 명예를 좇아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자연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꽃이 피고 지는 일에 봄은 개의치 않고, 구름이 오고 가도 산은 다투지 않습니다. 세상인심은 날씨처럼 조변석개(朝變夕改) 변하지만, 자연은 그 변화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김시습은 마지막에 세상 사람들에게 조용하면서도 묵직한 화두(話頭) 하나를 던집니다. ‘取歡無處得平生! 세상인심 속에서 평생 변하지 않는 기쁨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시를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잠시 맑았다가 다시 비를 내리는 하늘과 같지만, 우리 마음만은 구름에 흔들리지 않는 산처럼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오신화 속에 있는 단편 소설 중 ‘취유부벽정기’는 옛 기자 조선의 도읍지로 알려진 평양을 배경으로 남자 상인 홍생과 죽어서 선녀가 된 기자(箕子)의 딸이 평양의 부벽정(浮碧亭)에 올라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면서 정신적인 사랑을 나눈 이야기입니다. 고국의 흥망에 대한 회고의 정(情)을 담은 일종의 애정 소설 같지지만, 세조가 힘으로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란(癸酉靖亂)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는 은유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있는 많은 시(詩) 중에서 주인공 두 남녀가 주고받은 한 수를 함께 읽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浿江之水碧於藍 (패강지수벽어람)
千古興亡恨不堪 (천고흥망한불감)
金井水枯垂薜荔 (금정수고수벽려)
石壇苔蝕擁檉楠 (석단태식옹정남)
異鄕風月詩千首 (이향풍월시천수)
故國情懷酒半酣 (고국정회주반감)
月白倚軒眠不得 (월백의헌면부득)
夜深香桂落毿毿 (야심향계낙삼삼)

대동강 물결이 쪽빛보다 더 푸른데
千古(천고)의 흥망사가 한스러워 못 견디겠네
물 마른 金井(금정)에는 넝쿨나무 드리웠고
이끼 낀 돌계단은 능수버들이 에워쌌네
타향의 風月(풍월)은 千首(천수) 시로 읊고
옛 도읍의 회상으로 거나하게 취하노라
달 밝아 난간에 기대어 잠 못 이룰 때
한밤 계수나무 꽃이 사락사락 떨어지네

中秋月色正嬋娟 (중추월색정선연)
一望孤城一悵然 (일망고성일창연)
箕子廟庭喬木老 (기자묘정교목로)
檀君祠壁女蘿緣 (단군사벽여라연)
英雄寂寞今何在 (영웅적막금하재)
草樹依稀問幾年 (초수의희문기년)
唯有昔時端正月 (유유석시단정월)
淸光流彩照衣邊 (청광류채조의변)

한가위 달빛이 곱디고운데
외로운 성을 바라보자니 서글픔 이는구나
箕子(기자) 廟堂(묘당) 뜰에는 교목이 늙었고
檀君(단군) 祠堂(사당) 벽에는 담쟁이가 얽혀 있네
영웅들 적막해라 지금 어디에 있나?
초목만 아련하기를 그 몇 해이런가
단지 옛날의 둥근 달만이 남아서
맑은 빛 곱게 흘려 옷깃을 비추어 주네

- <매월당 김시습 금오신화>(홍익출판사, 심경호 역, 2000)

화 한 편이 인연이 되어 단종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여러 차례 시도되었던 복위 운동, 또 그와 관련 있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관심 있게 공부하는 기회가 되어 저 개인적으로는 참 좋았습니다. 무려 241년이 지난 후에야 ‘단종’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으면서 복위된 단종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매월당 김시습이라는 천재 시인, 그리고 그가 쓴 <금오신화>와 시편들까지 이르렀으니, 영화가 작품성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큰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직 <왕과 사는 남자>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오늘 시간을 내서 한번 관람해 보시는 건 어떨는지요. - 석전(碩田)

영화 왕.사.남.의 장면들....
2026년 1월, 김시습 전집을 완역하여 출간한 고려대 심경호 명예교수
계룡산 동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