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그런 날 / 가구의 힘 - 박형준

석전碩田,제임스 2026. 3. 25. 06:00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그런 날

- 박형준

오래 서가에 꽂아 둔 낡은 책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썼던 편지를 발견할 때,
마치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아릴 때
그런 날에는, 정말
먼지를 뒤집어쓴 악기를 꺼내어 연주해야 한다
가슴에 묻어 둔 사랑의 밀어를 바라보면
기억조차 희미해져 제 별자리로 돌아간 듯하다
어느 누군가도
나에게 그런 편지를 썼으리라
흐릿한 시간의 별자리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어린 무 잎처럼 아린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부치지 못한 편지들
먼지와 세월에 얼룩진,
뒤틀린 책 속 공명통에서 울리는
나의 밀어와 영혼을 간직한 악기여

- 시집 <불탄 집>(천년의 시작. 2013)

* 감상 : 박형준 시인.

196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예술 전문대학을 거쳐,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4년부터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서울예술전문대학 시절 오규원, 최하림 시인을 만나 지도를 받았습니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서 ‘가구의 힘’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창작과비평사, 1997),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작과비평사, 2002), <춤>(창비, 2005),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 <불탄 집>(천년의시작, 2013), <줄 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창작과비평, 2020) 등이 있습니다.

과 시문학상(1996), 제15회 동서문학상(2002), 현대시학작품상(2005), 소월시 문학상(2009), 육사시문학상(2012), 풀꽃문학상(2020)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인은 어느 날, 서가에 오래 꽂혀 있던 책 속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합니다. 부치지 못한 채 남겨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썼던 편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고 지냈던 말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편지를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읽어보니, 그때 누군가를 향해 건넸던 말들이 어느새 나 자신에게로 돌아와 닿습니다.

'마치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아릴 때'라는 구절처럼, 지나간 마음이 현재의 나를 건드리는 순간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말들은, 어쩌면 누군가가 나에게도 건넸을 것입니다. 다만 시간 속에서 흩어지고, 희미해졌을 뿐입니다.

렇게 생각이 미치는 지점에서, 시인은 문득 자신 안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한때는 분명히 간직하고 있었을 사랑의 밀어와 어떤 맑은 감정들이, 지금도 여전히 제 자리에 남아 있는지.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들을 담고 있어야 할 내 안의 공명통이 과연 예전처럼 소리를 낼 수 있을지 스스로 쉽게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지를 뒤집어쓴 악기'라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를 넘어,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처럼 읽힙니다.

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그 안에 어떤 소리가 남아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 그럼에도 시인은 말합니다. '그런 날에는, 정말 / 먼지를 뒤집어쓴 악기를 꺼내어 연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무엇을 시작하겠다는 다짐이라기보다, 이미 내 안에 있었던 어떤 울림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특별한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저 한 통의 편지가 불러온 추억을 따라가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지금의 자신을 조용히 바라볼 뿐입니다.

실 나이 들어가면서, '추억의 힘으로 산다'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음식도 맛으로 먹기보다는 추억으로 먹는 것 같습니다. 아내와 동네 골목 시장에 가끔 가면 찐빵 가게 앞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것도 어릴 적 추억을 더듬는 대표적인 저만의 버릇입니다. 또 겨울철 뜨거운 국물이 끓고 있는 오뎅 가게 앞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입니다.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박형준 시인의 등단작 ‘가구의 힘’입니다.

가구(家具)의 힘

-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家具)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家具)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ㅡ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家具論)을 펼쳤다.

- 1991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 시 당선작
-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그런 날'에서 시인이 우연히 발견한 한 통의 편지로 인해 잊고 지냈던 마음의 울림통을 소환해 내어 그 소리가 아직도 건재(健在)한지 확인하고 싶었다면, 이 시에선 졸부 외삼촌의 허세와 비록 보잘것없지만 손때가 묻은 집의 가구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가난했던 시절 자신이 만들어 놓은 ‘눈물 젖은 가구론’을 추억 해내는 구조가 많이 닮아있습니다. 시 속에서 언급된 ‘가구’는 단순한 물건이 아닙니다. 서랍을 열 때마다, 또 장롱에 남은 생채기를 마주할 때마다, 그 집을 지나온 시간들이 함께 따라 나옵니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라는 구절처럼, 가구는 시간을 저장하고, 그것을 다시 불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라고. 이 문장은 어떤 설명이라기보다, 하나의 깨달음에 가깝게 다가옵니다. 새것은 아직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지만, 오래된 것은 그 안에 이미 많은 추억을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 책 속의 편지 한 통이 잊고 있던 마음을 불러냈듯이, 오래된 가구 하나가 지나간 시간을 다시 현재로 끌어온 것입니다.

국 두 편의 시는 같은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추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우리를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추억들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다시 말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추억은 어느 날 문득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하고, 다시 살아가게 하는 조용한 힘이 됩니다.

래서 이번 봄에는, 먼지를 털어낸 악기로 지난 추억을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먼 훗날 내 안의 악기에 어울릴 새로운 추억 하나쯤 만들어 보고 싶어집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