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정경
- 김이듬
1
불타는 숲
불길이 치솟는 마음
나는 잊을 것이다
잊어야 한다
잊을 수 있다
불타는 숲
연기가 치솟는 마을
재가 된 구름은 엉겨 붙지 않는다
사람들의 불 연관 비유에
나는 문제를 느끼지만
체액이 끓어오르거나 그러진 않는다
체험하지 않은 자들의 가소로운 엄살
아름다운 무신경
불타는 숲
연기가 치솟는 마을
타죽은 사람들
나는 삶을
각오하지 않는다
2
이곳에는 먹지 말아야지 하면서 먹는 사람이 없다 자지 말아야지 하면서 자는 사람도 없다 매순간이 살을 썰어 가는 것 같다 중학교 강당 바닥에 그레이 컬러 캠핑용 야외 매트를 쭉 깔고 누운 사람들 나는 피크닉 왔다는 상상에 실패한다 배를 깔고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 쓴다 쓰고 쓺으로써 빠져나갈 수 있다는 착각마저 없으면서
이틀 밤을 새우면 쓰기를 멈출 수 있다
자고 일어나니 천막이 세워지고 있었다 입체적인
나는 내가 겪은 걸 토대로 언어의 텐트를 친다 나는 안 겪은 걸 못 쓴다 바로 지금을 쓰는 버릇 타인들이 싫어하든 지겨워하든 나는 별로 돌려서 말하지 않는다 너무 현실이라서 믿기 어려워하지
나는 씻지 않는다
기분을 갈아입지 않는다
보건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건강 체크 심리 진단 해 준다며 줄 서라고 했다 후회나 책임감도 병이라고 하겠지
3
수면 유도제를 먹고 갔다 할머니가 내 손가락 두 개 따고 배를 만져 주었다 체한 저녁이 내려갔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 무당이었다 여러 날 물고기 못 잡던 어부의 청에 굿을 하면 뱃길이 내려앉을 듯 만선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보름 전이었다 동네에서 나랑 말이 제일 잘 통했던 할머니 정갈했던 마루 미래를 내다보던 할머니는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꿈길에서 나오니
옷이 있었다
이웃은 이 옷들을 나 대신 받아서 머리맡에 갖다 놓았다
브레지어와 팬티, 겉옷 세 개
다 안 맞다 나는 보기보다 큰 사람인데
운동장에서 진행된 이재민 의류 배부가 끝났다고 했다 털실 옷을 입고 봄바다 넘실거리는 나의 절벽을 향해 갔다
언덕은 비비는 곳 절벽은 불타는 곳
바다는 비빌 언덕이 없어 스스로 파도를 만들겠지
가도 가도 길 막는 표지판
끝없이 산불 재해 구역
타들어 가는 해마저 저주하다가
넘어져 울었다
내일은 모두 산고개 넘어 임시주거지로 옮길 것이다 짐이 많다 이곳에서 나는 가장 젊고 건강한 사람 축에 속한다 멀지 않은 후일의 내가 보인다 먼저 자욱한 귀퉁이에 서서 내가 부축해야 할 노인들을 회피한다
임시로 음악을 듣고 임시로 밥을 먹는다 빨래도 널 것이다 임시로 별이 뜨고 지겠지 그곳에 무허가 총기 소지자는 없을 것이다 평생 임시적이라 죽은 듯이 잘 수 있겠다
-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민음사, 2025)
* 감상 : 김이듬 시인.

196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성장했습니다. 부산대 독문학과(학사)와 경상대 국문학(박사)과를 졸업했습니다. 2001년 <포에지>에 ‘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라는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별 모양의 얼룩>(천년의 시작, 2005),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 지성, 2007), <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 지성, 2011), <베를린, 달렘의 노래>(문학동네, 2013), <히스테리아>(문학과 지성, 2014), <표류하는 흑발>(민음사, 2017),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현대문학, 2019), <투명한 것과 없는 것>(문학동네, 2023),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타이피스트, 2024),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민음사, 2025) 등이 있습니다.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문학동네, 2011), 산문집 <디어 슬로베니나>(로고 폴리스, 2016), <모든 국적의 친구>(난다, 2016) 등이 있습니다.
김달진창원문학상(2011), 시와세계작품상, 22세기 시인작품상, 올해의좋은시상, 김춘수시문학상(2015), 전미번역상과 루시앤스트릭 번역상(미국 문학번역가협회, 2020), <양성평등 문화인상>(2021), 샤롯데문학상(2024), 이형기문학상(2025) 등을 수상했습니다.
경상대에서 시 창작과 문학을 가르쳤으며,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 작가로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강의와 워크숍을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현재는 웹진 <시산맥> 주간을 맡고 있고 서울대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꾸준한 시작 활동을 펼친 그녀에겐 '페미니즘 시인', '관능의 시인'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주로 방랑과 관능을 여성의 시선에서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봄이 오면, 우리는 으레 꽃을 떠올립니다. 벚꽃을 비롯한 온갖 봄꽃들이 흐드러지고, 바람은 부드러워지며, 마음도 조금은 풀리는 화사한 계절. 그런데 같은 봄을 두고도 전혀 다른 풍경을 살아낸 사람이 있습니다. 김이듬의 시를 읽으며, 똑같은 봄을 보냈고 또 똑같은 대형 산불을 겪었지만 나는 그저 '그 대형 산불을 뉴스로만 소비했구나'하는 깨달음, ‘같은 계절을 살지 않았던’ 나 자신을 비로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시인이 경북 영덕에 귀촌해 마련한 작은 보금자리가 2년 전 덮친 대형 산불로 인해 처참하게 사라졌습니다. 불길은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집은 물론 시인과 가장 잘 통하던 이웃집의 할머니까지. 모두 만물이 생동하고 꽃 피고 화사한 '봄'이라고 말하는 계절이었습니다.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은 시인이 그날의 상황을 에둘러 비유나 은유로 노래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노래한 시가 바로 이 시입니다.
이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봄의 언어를 처음부터 무너뜨립니다. ‘불타는 숲’과 ‘연기가 치솟는 마을’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닙니다. 그저 실제였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잊어야 하는 기억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가슴이 불타오른다’, ‘열정이 불꽃처럼’ 같은 표현을 하지만 시인은 노골적으로 거부합니다. ‘사람들의 불 연관 비유에 / 나는 문제를 느끼지만’...여기서 시인은 말합니다. 불은 그냥 불이라고요. 타고, 죽이고, 앗아가는 물리적 재난이지, 감정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날카롭습니다. ‘체험하지 않은 자들의 가소로운 엄살 / 아름다운 무신경’. 이건 그저 산불을 뉴스로만 소비했던 나를 포함한 독자를 향한 직격이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며 오래 남는 한 문장은 ‘나는 삶을 / 각오하지 않는다’는 문장이었습니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폐허 속에서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말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니,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아야겠다는 다짐조차 사치가 되는 순간. 그 무너진 자리에서 시인은 어떤 의미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기록할 뿐입니다. '쓰고 쓺으로써 빠져나갈 수 있다는 착각마저 없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쓰고 있습니다. 이 시의 아이러니이자 본질입니다.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쓰는 것 말입니다.
2부와 3부로 갈수록 시는 더욱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내려옵니다. 체육관 바닥에 깔린 매트, 줄을 서서 받는 구호 물품, 맞지 않는 옷, 그리고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한 사람의 죽음. 뉴스에서는 숫자로만 지나갔던 장면들이, 여기서는 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로 남습니다. 우리는 재난을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이 시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마음에 걸리는 표현은 ‘임시’라는 말입니다. 임시로 먹고, 임시로 자고, 임시로 하루를 버팁니다. ‘평생 임시적이라 죽은 듯이 잘 수 있겠다’는 표현은 현재 시인이 처한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듯하여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이 삶 전체가 임시가 되어버린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 김이듬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올리브유로 비누 만들기만큼 쉽게 지나갔다
봄에 나는 죽어 있었고 내가 죽으면 애인은 어찌 살까 걱정하지 않았다 애인은 내가 죽기 전에 죽었으니까 나의 집은 황무지가 되었다 풀들이 불에 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나는 벽돌만 한 비누를 집어 던지지 않았다
자연은 좋겠다 폭풍이든 초대형 산불이든 지진이든 일으켜도 자연을 벌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인재 사람의 잘못이라고 말하니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유학가기 전엔 매일 다퉜던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동생이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얼굴이 벌개가지고 울면서 나왔다
유머를 잃어버렸지만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을 보냈다 내 동생은 남자처럼 보이지만 여자다 키가 백팔십이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 이렇게 설명해 봤자 그 아주머니는 남자가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냐고 소리쳤다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내 탓이오라고 말하지 말라며 나는 동생을 다독였다 자연에는 암수 외에도 성이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향기로웠다 봄이었다
- 시집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민음사, 2025)
이런 대형 산불을 겪고 자포자기할 만도 한데 시인은 이번 시집의 또 다른 시에서 담담하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체험하지 않은 자들의 가소로운 엄살 / 아름다운 무신경' 때문에 분노할 만도 한데 시인은 평온하게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용서의 결과가 아니라 감정의 소진에 가깝습니다. 미워할 힘조차 남지 않은 상태. 분노도, 관심도, 눈치도 없이 지나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계절은 그렇게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봄’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나 할까요.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 조용히 말을 바꿉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이 문장은, 폐허 위에 남아 있는 아주 미세한 감정의 온도처럼 느껴집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 무엇. 동생을 향한 마음, 누군가를 다독이는 손길, 그리고 끝내 남아 있는 사람들과의 인연. 어쩌면 그 희미한 감정이야말로, 이 시가 끝까지 놓지 않은 마지막 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은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로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꽃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끔찍한 불의 기억입니다. 그렇다고 '그 현장에서 모든 걸 잃고 망연자실(茫然自失)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구나'하는 죄책감이나 자책감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이 시가 우리를 데려다 놓은 자리, 즉 '몰랐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그 자리'에서 이제는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며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세일 것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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