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연옥의 봄 1 - 황동규

석전碩田,제임스 2016. 11. 29. 09:43

조간 신문 문화면에 실린 황동규 시인과의 긴 인터뷰 기사를 정독했습니다. 일흔 여덟의 나이에 열여섯번째 시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참으로 성실하게 살아 온 노 시인이지만, 너무 유명한 아버지를 둔 덕에 늘 아버지의 그림자 때문에 힘겨워 했다는 고백을 들으며 가슴 애잔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도 본인이 느끼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서일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늘 아버지의 그림자가 나를 가리곤 했는데 예순을 넘어서니 해방시켜주더군요. 지난 시절에는 술 말고는 의존할 데가 없었어요. 예전에는 1년에 350일 정도 마셨는데 지금은 조금 줄어서 300일 정도 청탁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번에 낸 그의 시집에 표제 작으로 실린 <연옥의 봄1>이라는 시를 함께 감상하고 싶어서 이곳에 전재해 올립니다.

 

같이 가던 사람을 꿈결에 놓쳤다

언덕에선 억새들 저희끼리

흰 머리칼 바람에 날리기 바쁘고

샛강에선 물새들이 알은체 않고/ 얼음을 지치고 있었다.

쓸쓸할 때 마음 매만져주던 동네의 사라진 옛집들도

아직 남아 있었구나! 눈인사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기억엔 없어도 약속은 살아 있는지

아무리 가도 닿지 않는 찻집으로 가고 있다.

왕십린가 청량린가? 마을버스 종점인가?

반쯤 깨어보니 언제 스며들었는지

방 안에 라일락 향이 그윽하다.

그대, 혹시 못 만나게 되더라도

적어도 이 봄밤은 이 세상 안에서 서성이게.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어느 봄날, 시인이 산책길에서 돌아온 감상을 노래한 시입니다. 같이 가던 이를 꿈결에서 놓쳤는지 이승에서 영영 놓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네의 사라진 옛집들이 다시 나타나고 눈 인사를 해도 받지 않는 것을 보면 예삿일은 아닙니다. 약속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아무리 가도 닿지 않는 찻집을 향해가는 심정이란 허망하고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다행히 꿈이었습니다. 반쯤 깨어 라일락 향기가 코 끝에 맡아지는 걸 보니 내가 지금 이승에 있음을 증거합니다. 적어도 봄밤만큼은 이승에 더 머물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이 애틋하게 다가오는 시입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노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달려 갈 삶의 여정을 바라보며, 그래도 이승에서 하루라도 더 서성이고 싶다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시가 정답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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