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독후감·책·영화·논평

신사임당 진노하시다 - 박정선 시인·소설가

석전碩田,제임스 2012. 6. 8. 09:51

조간 신문을 읽으면서 이 글을 읽고 난 후, 글을 이렇게 긴 서사시처럼 잘 쓸수도 있나 싶어, 인터넷 신문을 검색해서 다시 읽고 싶었지만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여러 날이 지난 오늘 아침, <책동네산책>이라는 제목의 고정 컬럼이라는 사실에 착안, 검색을 해 봤더니 이 글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상징성이 어떻고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하는 복잡한 이론들은 잘 모르지만, 이런 글을 읽으면 '글 잘 쓰는 게 어떤건지 그냥 느낄 수 있는 것'같아 가슴이 마구 콩닥콩닥 뜁니다. 긴 시 한 편을 읽은 느낌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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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돈으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때 나는 가문의 영광이겠거니 했었다. 영광이었다. 일개 아녀자인 나를 위대하신 세종대왕님이 새겨진 것의 다섯 배나 되는 큰돈에 새겨주었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으나 내가 어머니였으므로 돈보다 더 좋은 것을 낳아 달라는 주문으로 알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더욱이 내가 그린 소박한 그림까지 곁들여진 것을 보고 아, 내 후손들은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원하는구나, 라고 참 대견해했다. 돈으로 예술을 사는 기특한 후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으로 예술을 사면 예술이 정신을 낳고 정신은 이 나라를 받쳐주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리라 믿었다.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나를 돈에 새기자마자 앞다투어 나에게 굴욕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약자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되기 위해, 나라에 세금을 내기 싫어서 나를 뭉치, 뭉치, 묶어 사과상자로 위장하거나 땅속에 묻거나 장롱 안에 감추었다.

내가 김장독이더냐? 사과나 잡동사니 물건이더냐…? 나는 나쁜 짓을 저지르는 족속들을 돕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올해 들어 해동이 되자마자 내가 묻혀 있었던 마늘밭을 돌아봤다. 그 마늘밭에도 봄이 와 마늘 싹이 쫑긋쫑긋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다 지나간 일이겠거니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더욱이 5월이 아니던가. 5월이면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새롭게 시작하고 사람의 마음도 바뀔 수밖에. 만사 잊고 나도 꽃이며 청아한 연초록 새잎에 취해 모처럼 웃어보았는데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미래저축은행?  솔로몬 저축은행? 한주저축은행? 듣도 보도 못한 저축은행에 수천억? 수백억? 수십억? 그리고 교사 장사?

피를 토할 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건 교사 장사를 한 그 파렴치한 교장이란 자다.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을 뽑는 일에 실력자들을 내버리고 1억 수천을 갖다 바친 병든 자들을 골라 세우다니. 병든 교장과 병든 선생들이 감히 아이들 앞에 버젓이 서다니….

17억이란 거금의 내 얼굴을 장롱 속에 쌓아두고 들여다보며 희희낙락 즐거워한 그 교장을 생각만 해도 나는 그만 은장도로 가슴을 팍, 찔러 죽고 싶은 심정이다.

걸핏하면 신문에 텔레비전에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자결을 꿈꾼다. 이제 더 이상 나쁜 일마다 내 얼굴이 등장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굴욕을 인내할 힘이 없다. 아니 인내하지 않겠다.

엄히 요구한다. 나를 그 은밀한 돈에서 삭제해 달라. 나는 평생 가난했으나 은밀히 살아본 적 없었다. 땅속이나 장롱이나 사과상자에 몰래 숨은 적 없었다. 나에겐 당당한 가문이 있었고 그대들이 흠모하는 내 아들 율곡의 어미로서 소신껏 살았더니라.

그대들도 잘 알듯이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기 좋아했던 욕심 없는 아낙이었다. 그림 중에서도 특별하지도 않은 꽃과 풀이며 벌레들과 수박 포도송이 같은 흔하고 정겨운 것들만 골라 그렸다. 꽃과 풀은 피고 지는 인생과 똑같아서 좋아했고 수박과 포도는 사람이 땀 흘려야 얻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마침 돈에는 수박과 포도그림을 넣어놓았지 않은가. 땀 흘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넣은 것을 보고 처음엔 감복했다. 그런데 그대들은 수박과 포도의 단맛을 좇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돈에 얼굴을 올리는 게 아니었다.

 

오죽헌 대숲에서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그 은밀한 돈에서 나오라 재촉한다. 나는 한시 바삐 내 고향 강릉으로 돌아가리라. 가서 끝없이 펼쳐진 쪽빛 바닷물에 때 묻은 내 얼굴을 씻으리라. 씻고 또 씻고 피가 나도록 씻으리라. <세계일보 2012년 5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