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1분 묵상

[요 1:43 ~ 51]요한복음서를 다시 펼쳐들며

석전碩田,제임스 2008. 5. 14. 20:15

복음서 중의 한 책인 요한복음은 성경에서 참 독특한 책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공관복음(空觀福音)이라고 하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뜻하고 요한복음은 포함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관복음의 다른 책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함에 있어, 각각 강조점이 다르긴 하지만 예수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이들 세 복음서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요한복음은 요한이 죽기 전에 기록된 책입니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요한이 죽기 전에 기록한 책이라고 하면, AD 80년이나 90년경에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가 AD33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거의 50~60년이 지난 후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없는 동안, 60년 세월을 더 살아 가면서 요한은 살아 생전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분이 하셨던 말씀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그 당시에는 몰랐던 것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보니 깨닫게 된 말씀도 참 많았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를 따라다니면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들이, 삶 속에서 새롭게 깨달아지면서 그 말씀들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들이 많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질 그 때까지도 어쩌면 요한은 예수 그리스가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으며, 그 분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몰랐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1216절 참조) 그러나 살아가면서, 아니 인생의 마지막 구간을 달려가고 있는 노구의 몸으로, 젊은 시절 따라 다녔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 분이야말로 바로 생명이시며 독생하신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고 또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마음 속으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예수를 확실하게 알려야겠다는 결심 말입니다. 요한복음 2030절과 31절을 보면, 요한이 이 책을 기록한 분명한 목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하려 함이니라]  

 

맞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객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역한 것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요한복음은 제자 요한이 일생을 살아내고 난 후, 삶 속에서 새롭게 만난 예수, 삶의 순간 순간에서 다시 재해석한 예수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믿게 하려고 쓴 일종의 신앙고백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복음을 공관복음서로 분류하기는 곤란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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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생명이신 이 예수를 소개하면서 요한복음 11절에서 천둥처럼 크게 울리는 선언을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다>는 선포 말입니다. 이 구절을 읽노라면 마치 창세기 11절에서 성경 기자가 선포하고 있는 똑같은 감동이 생깁니다. 천지가 창조되는 그 엄청난 사건의 감동말입니다. 요한은 창세기 11절에서와 똑같은 호흡으로 말씀이셨던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 하나님이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목청껏 증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한이 독생하신이란 표현을 한 것은 요한복음 118절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도 가감(加減)없이 닮았다는 뜻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알면 곧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를 만나면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없는 <완벽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독생하신이란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완전하신’, ‘완벽하신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하나님은 말씀이셨고 그 말씀이셨던 예수가 자기 땅에 오매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를 미워해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요한 1:12) 선포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요 생명이며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다음 구절에,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는 광경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먼저 요한 자신과 안드레가 예수를 좇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안드레의 소개로 베드로가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그 다음은 빌립이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빌립은 안드레, 베드로와 벳새다라는 마을에 함께 사는 동네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빌립이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한 후, 나다나엘을 찾아 예수를 소개하고 나다나엘이 예수께 나아와 만나는 장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저는 늘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다나엘이 예수가 하신 평범한 말에 왜 그렇게도 완벽하게 변화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가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나다나엘이 어째서 이런 엄청난 고백을 했을까요? 여러분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런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예수께서 이 나다나엘의 엄청난 고백에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하시니라.(51)  

 

도대체 이 대화들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이것을 풀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를 따라가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빼닮은 독생하신(완벽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영접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지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언했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예수가 제자를 부르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적어도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과 같지 않게 이 예수를 영접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즉 본문에 나온 이 제자들 - 요한인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제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영접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서도 나다나엘의 만남을 비교적 길게 쓴 이유는, 나다나엘의 고백이야 말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고백일 뿐만 아니라 또 고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바로 이 고백을 요한은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곧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며 참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고백말입니다  

 

나다나엘은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를 평하기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좇아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아마도 그는 날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기도 처소인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냥 그저 그렇게 기도하는 기도가 아니라, 이 땅을 새롭게 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가 다시 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메시야가 속히 와야겠다고 하나님께 너무도 처절한 기도를 여러차례 해 왔을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이 사실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를 소개하는 내용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145)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났을 때, 전혀 예상치도 않은 대답을 예수로부터 듣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내가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무화과 나무 아래서 나다나엘이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일까요? 이 말 한 마디에 나다나엘과 예수 사이에 엄청난 소통이 일어납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아무도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아무도 없는 그 때, 너를 보았다는 말은, 내가 곧 네 기도를 들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시각과 이 세상의 안목으로 바라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역사상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처음 시작한 창시자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를 안다고 고백하고, 믿는다고 말하는 신자들마저도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눈으로, 머리와 지식으로만 인정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요한 8:32)에만 비로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처절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