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독후감·책·영화·논평

Steve Jobs의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

석전碩田,제임스 2010. 1. 27. 10:57

   2005년 스탠포드 졸업식에서 Steve Jobs가 했던 연설입니다. 맥킨토시 컴퓨터와 컴퓨터회사 애플 등 이 시대에 그를 모르고서는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지요.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 중 한 곳인 이곳 스탠포드 대학에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 이곳이 제가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와본 게 될 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제 삶에서 뽑은 세가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게 다 입니다. 별 게 아니죠. 딱 이야기 셋이 다입니다.

 

첫째 이야기는 삶에서 점을 서로 연결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칼리지에 들어간 지 한 학기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 일년 반 동안 캠퍼스 주위에서 얼쩡거리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제가 왜 학교를 그만두었나, 말씀 드리죠.

이를 설명하려면 제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제 생모는 결혼하지 않은 젊은 대학원생이었던 탓에 저를 낳은 후 바로 입양시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제 생모는 저를 데려가는 양부모가 적어도 대학은 졸업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난 후 바로 어느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이미 얘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세상에 나오자 이 변호사 부부는 자기네가 원한 것은 사실 딸이었다면서 안면을 바꿔버렸고,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올라있던 제 현재 부모님은 한밤중에 입양기관으로부터 전화를 받고서 “예상치 않았던 남자 아기가 한 명 있는데 데려갈래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 거죠. 제 부모님의 대답은 “물론”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모가 나중에 제 어머님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고 제 아버님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서는 입양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제 부모님이 저를 꼭 대학에 보낸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제 생모는 고집을 꺾었습니다. 이것이 제 삶의 출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칠 년이 지나고서 저는 실제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제가 순진했죠. 선택한 대학이 거의 이곳 스탠포드만큼이나 학비가 비싼 곳이었습니다. 노동자 계층에 속하는 제 부모님이 평생 모아온 돈을 제 학비로 다 쓰게 된 셈이었죠. 한 학기가 지난 후 저는 대학교육의 값어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 삶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감도 잡지 못할 때였고 대학교육이 그걸 찾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죠. 그런 데에다 제 부모님이 일평생 모아 온 돈을 고스란히 쏟아 붓고 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게 다 잘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죠. 당시는 무척 두려웠습니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삶에서 내린 결정 중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두자 별 흥미도 당기지 않는 필수 코스를 들을 필요가 없어졌고, 그래서 흥미로운 것만 골라서 들어갔습니다.

낭만적인 일은 아니었죠. 기숙사 방이 없으니까 제 친구 집 거실 바닥에서 자야 했고 콜라 병을 모아서 한 병 당 5센트를 받아 먹을 것을 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매주 일요일 밤이면 10킬로를 걸어서 도시 반대편에 있는 하레크리슈나 사원으로 갔습니다. 그 사원 정말 좋았죠. 제가 제 호기심이 당겨서나 아니면 직관을 좇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들 대개는 나중에 생각해 보면 참 값진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하나 들죠.

당시 리드 칼리지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좋은 서예 강좌가 있었습니다. 캠퍼스에 붙어있는 포스터나 서랍에 붙어 있는 라벨에 쓰인 글들은 죄다 아름다운 손 글씨들이었습니다. 전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고 따라서 일반 수업은 들을 필요가 없었기에 이 서예수업을 듣기로 작정하고 들어가서 ‘세리프’ ‘산세리프’ 등등의 글자체에 대해서도 배웠고 글자의 조합이 달라질 때마다 여백을 달리하는 것 등도 배웠습니다. 좋은 서체란 무엇인가, 하는 것도 배웠죠. 서예는 과학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 혼이 묻어나는, 예술적으로 아주 미묘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매료되더군요.

당시 이게 제 삶에서 어떤 실용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 년 후 매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할 때 이 모든 게 기억 속에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맥 디자인에 넣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첫 컴퓨터가 되었죠. 제가 대학에서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맥에는 여러 서체도, 비율여백을 가진 서체도 탑재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도 맥을 베꼈던 까닭에 어느 피시에서도 찾아보지 못했을 공산이 큽니다. 제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서예수업을 듣지 않았을 테고 서예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피시에서 그처럼 아름다운 서체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물론 그 당시 앞을 내다보면서 이처럼 점을 서로 연결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뒤를 돌아보면 아주 분명하게 연결선이 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앞을 내다보면서는 서로 다른 점 사이를 연결하는 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뒤돌아볼 때만 그 연결선이 보입니다. 따라서 삶에서의 점들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되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뭐라도 믿어야 합니다. 그게 육감이든지 운명이든지 삶이든지 카르마이든지, 뭐라도 믿어야 합니다. 점들이 장래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결될 것이라 믿을 때 자기 가슴이 시키는 일을 좇을 수 있는 자신감이 솟게 되는 까닭입니다. 설령 그러는 것이 이미 잘 닦인 길에서 벗어나는 일임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제 삶을 확 바꾼 것입니다.

 

둘째 이야기는 사랑과 잃음에 대한 것입니다.

전 운이 좋았습니다. 일찌감치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기 때문이지요.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제가 제 부모님 차고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제 나이 스무 살 때였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차고 안에서 두 사람이 시작한 애플사는 십 년 후 한 해 매출 20억 달러에 종업원 수 4000명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그 일 년 전에는 그때까지 저희가 시장에 낸 제품 중 가장 뛰어난 제품, 즉 매킨토시를 출시했고 저는 막 서른 살이 되었을 때였죠. 그리고 저는 회사에서 잘렸습니다. 창업한 회사에서 어떻게 잘릴 수 있느냐, 하면 말이죠, 회사가 커지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이끌어 갈, 당시 제 생각으로 무척 재능 있다고 여긴 사람을 영입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첫 해는 잘 풀려나갔죠. 하지만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 저희 두 사람의 비전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사이가 버름해졌습니다. 저희 사이가 소원해지자 이사회에서는 그 사람 편을 들더군요. 그래서 나이 서른에 저는 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쫓겨났죠. 제가 어른이 된 후 제 삶의 초점이었던 게 사라진 셈이었습니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몇 달 동안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 선배 기업가들을 실망시켰다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 분들이 저에게 넘겨준 바통을 떨어뜨렸다고 여겼죠. 저는 데이빗 패커드(휼렛 패커드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창업자, 실리콘밸리의 시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함)와 만나 그처럼 일을 망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공개적인 실패자였고 실리콘밸리를 떠날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차츰 깨달아지는 게 있더군요. 저는 여전히 제 일을 좋아한다는 것. 애플에서 벌어진 일은 그 사실에 조금의 흠집도 내지 못했다는 것. 저는 거절당했지만 저 자신은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 그래서 다시 밑바닥부터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시에는 보지 못했지만 세월이 흐른 후 돌이켜보면 애플에서 잘렸던 것이 제 삶에서 가장 좋은 일이었죠. 성공한 사람으로서 짊어졌던 짐은 모두 없어지고 그 자리에 다시 시작하는 사람으로서의 가벼움이 들어찼습니다. 모든 일에 좀 더 신중해졌지요. 애플에서 잘림으로써 저는 자유로워졌고 그것은 제 삶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오 년 동안 저는 NeXT를 세웠고 ‘픽사’라는 이름의 회사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된 여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요. 픽사는 나중에 세계 최초의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인 ‘토이 스토리’를 제작하게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으로, 애플이 NeXT를 사게 되었고 저는 애플로 귀환했습니다. NeXT에서 개발했던 기술은 지금 애플 르네상스의 핵에 자리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제 아내인 로렌과 저는 좋은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애플에서 제가 쫓겨나지 않았다면 이 중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아주 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는 필요한 약이기도 했습니다. 때로 삶은 우리의 머리를 벽돌로 내려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지는 마세요. 제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던 까닭은 단 하나, 사랑의 대상을 찾았기 때문이라는 걸 확신합니다. 반드시 사랑의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도 찾아야 합니다. 일은 삶에서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는 까닭에 진정으로 만족하려면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일을 잘하려면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세요. 단념하지 마세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 수 있는 일이 으레 그렇듯 찾게 되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사랑하는 일과의 관계도 점점 더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찾을 때까지 계속 찾으세요. 대충 주저앉지 마세요.

 

 셋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열 일곱 살 때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매일 매일 그 날이 삶의 마지막 날인 양 살면 거의 틀림없이 어느 순간 너는 올바르게될지라.” 그 말은 저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 후 서른 세 해 동안 내내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삶에서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 하는 일을 그래도 할 테냐?” 만약 이 자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고 그런 날이 오래 되풀이된다면 제 삶에서 뭔가를 바꿔야 할 때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제 삶에서 큰 결정을 할 때 쓸 수 있는 가장 요긴한 도구가 바로 내가 금방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마주하면 거의 모든 것, 세상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나 모든 자부심, 창피를 당하거나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 등,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까닭에 남는 것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뿐입니다. 내가 뭔가 잃을 게 있다는 생각, 그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미 벌거벗고 있는데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까닭이 없는 셈입니다.

한 일 년 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일곱 시 삼십 분에 스캔을 받았는데 제 췌장에 종양이 확실하게 나 있더군요. 전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의 말로 치료할 수 없는 종류라 하더군요. 육 개월 이상 살기 힘들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주변 정리를 하라더군요.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을 의사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요. 아이들에게 앞으로 십 년 동안 해 줄 말을 몇 개월에 압축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모든 일이 깔끔히 정돈되어 내가 죽고 나서도 가족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도 되었습니다. 요컨대, 작별하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날 온종일 그 암 진단을 끌어안고 지내다가 그날 저녁 저는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내시경을 제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어 내장을 거쳐 췌장에 바늘을 꽂은 다음 종양으로부터 세포조직을 채취했습니다. 저는 마취된 상태였지만 제 아내의 말로 제 세포조직을 현미경으로 검사한 의사들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하더군요. 췌장암 중에서도 아주 희귀한 것으로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래서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이게 제가 죽음과 가장 가까이 마주한 경험이고 제 소망으로 앞으로 한 이십 년 동안은 이런 경험을 다시 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좀 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단순히 지적인 개념으로서만 유용한 게 아니라 말이죠.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믿는 사람마저도 천국에 가기 위해 죽으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가 향해가는 종착역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한 적도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인 까닭입니다. ‘죽음’은 ‘삶’이 변화를 줄 때 쓰는 에이전트인 셈입니다. 묵은 것을 씻어내고 새 것을 위해 길을 열어줍니다. 지금 그 새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서 여러분도 차츰 묵은 것이 되고 씻겨 나갈 것입니다. 너무 극적으로 말해서 미안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삶으로써 낭비하지 마세요.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 생각의 찌꺼기를 붙잡고 사는 삶을 살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의 소음이 여러분 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누르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가슴과 직관을 좇는 용기를 가지세요. 여러분의 가슴과 직관은 어떻게 그러는지는 몰라도 여러분이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외 다른 것들은 부차적인 것일 따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The Whole Earth Catalog”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제 세대에게는 성경이나 마찬가지였죠. 이 잡지를 창간한 사람은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멘로파크 출신 사람이었습니다. 잡지에 시적인 터치를 담았죠. 60년대 후반 얘기니까 피시나 데스크톱 출판이 나오기 전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타이프라이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들 수밖에 없었겠죠. ‘구글’이 나오기 35년 전의 종이판 ‘구글’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상주의적인 잡지였고 여러 멋진 도구들과 아이디어들로 넘쳐났습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잡지를 몇 번 내고 그 종착역에 다다르자 마지막 호를 냈습니다. 그게 7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때 제 나이가 여러분 나이였죠. 이 마지막 호의 뒤표지에는 꼭두새벽 어느 시골 길을 찍은 사진이 실려있었습니다.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크를 할 만한 그런 도로였는데, 표지 맨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폐간하면서 그들 식의 작별인사였던 셈이죠. 이제 졸업하고 새로이 시작하는 여러분에게 제가 해줄 말이기도 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