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로 말하라>(IVP 刊, 유진 피터슨 著)는 '이야기'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는, 유진 피터슨의 누가복음 비유 묵상서라고 할 수 있습니니다. 비유 중에서도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갈릴리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旅程)에서 예수께서 하셨던 이야기(비유)들을 묵상한 책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갈릴리에서부터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와 그 제자들의 여행(삶) 중에 오고간 대화들이 누가 복음에 '비유'라는 형태로 기록된 것을 <여행 내러티브>라는 독특한 이름을 붙혔습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왜 누가는 예수를 소개하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부각시켜서 여행 네러티브 안에 포함시켰을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합니다.
이 부분(누가 9: 51 ~ 19:44)에서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예수님이 들려 준 비유 몇 가지를 특별히 소개하고 있는데, 유진 피터슨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설교단상에서 선포되어진 말씀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공부반 등에서 들려지는 말씀 즉, 소위 말해서 거룩한 맥락에서 들려지는 언어로 씌여진 이야기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들려진 예수님의 언어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복음서의 저자 보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런 언어 - 가벼운 일상에서의 대화라든지 구조화되지 않은 언어-에 대해 광범위하게 소개하려 한다고 유진 피터슨은 지적합니다. 마가가 설교에 집중하고 마태가 가르침에 집중한다면, 누가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격의 없이 주고받는 언어에 집중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진 피터슨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들어 설명을 시도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가장 의미있는 두 지역,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에서'일어나는 일들에 누가는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지나야 하는 그 '사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즐겨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사마리아)이기도 하고 그들이 늘 익숙해 있는 갈릴리의 회당과 예루살렘의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척박한 땅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를 삶의 대부분을 살아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한 가르침과 설교가 선포되는 일요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날임에 틀림없습니다. 거룩한 고백을 하는 동료들이 옆에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곳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주위의 모두가 '내 편'인 사람들만이 있는 지정된 시간이요 장소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요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삶이 늘 일요일의 삶이 아닙니다. 갈릴리 회당 안에서의 삶(일요일의 삶)이 아니고, 또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입니다. 바로 사마리아에서 일어나는 삶입니다. 그 사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만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하게 되는 현실은 가정과 직장에서의 필요, 뜻하지 않는 반대와 난관, 우연한 사고와 험악한 자연재해 등 어찌보면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힘든 현실들과의 싸움 뿐입니다. 그곳에서는 누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그야 말로 '세속적인' 현장 그 자체입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잠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런지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대부분의 삶이 일어나는 그곳이 '세속적인' 장소인가 하는 것 말입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들려주셨던 그 이야기들 속에서,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그 여정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임을 알고, 다른 복음서 기자가 기록하지 않은 이야기를 기록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의사였던 누가의 눈으로 예수의 이런 일상의 언어 소통은 굉장한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성전에서 들려지는 예수가 아니라, 그 예수가 척박한 현실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리고 싶어하는 전도자의 심정이 누가에게는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복음서의 모든 저자들과 같이 '이야기하시는 예수'를 다루고 있지만 어떤 복음서 저자보다 누가는 훨씬 더하다는 것입니다. 누가가 비유를 들어서 예수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유진 피터슨은 말합니다. 마태(마11:34~35)나 마가(4:34)가 언급했던 것처럼 비유가 아니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예수의 방법을 복음서 저자들이 몸소 터득해서였을까요?
이쯤에서 유진 피터슨의 표현을 한번 따라가 볼까요?
비유는 나름의 형식을 가진 말의 형태다. 비유로 말하면 듣는 사람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동참하게 된다. 눈에 띄지 않게, 심지어는 은밀하게, 비유는 듣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이 간결하고도 흔한, 허세 부리지 않는 이야기가 대화 속에 던져져 우리 발치에 떨어지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비유(Parable)는 문자 그대로 ' ~의 곁에 던져진 무엇', 즉 para(곁에)와 bole(던져진)이 합성된 것인데, 그것을 본 우리의 첫 반응은 " 이게 왜 여기 있는거야?"이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상상한다. 비유는 보통 새로운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년 동안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우리가 간과한 것을 알아채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혹은 우리가 그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잊어버렸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연루되고 만다.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여 떠나셨던 예수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 없습니다. 불과 그 다음 주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소위 '세속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예수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또 얼마나 그것이 긴박한 것인지를 더 많이 인식할 수록 더 강렬한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마리아 지역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이 비유보다는 훨씬 명확하고 촛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설교나 가르침에서 배운 언어를 사용해서 영원토록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상황에서조차도 강렬한 언어 대신에 그런 평범한 이야기(비유)를 선택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여기에 비유, 즉 이야기의 마력이 있다고 유진 피터슨은 단언합니다. 누가의 여행 네러티브는 우리에게 바로 공식적인 설교와 의도적인 가르침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가벼운 대화 속에도 성령이 계시한다는 인식을 넓혀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여행 내러티브에 기록된 10개의 비유들에 대한 세세한 묵상 내용은 책을 읽으면서 그 맛을 직접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또 책의 제 2부에 수록된, <복음서에 기록된 기도들에 대한 유진 피터슨의 묵상> 내용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보너스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1장 34절~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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