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 - 곽효환 하늘 가득 펑펑 쏟아진 눈 쌓이고 동장군이 동네 꼬마들의 바깥출입을 꽁꽁 묶은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감자며 고구마를 삶고 누이와 나와 사촌들은 구들방 아랫목에 깐 이불에 발을 묻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길눈이 어둡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어느새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이자 이야기꾼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깊어도 마를 줄 모르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귀를 세우다가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에 진저리 치곤 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서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 서사 그 느낌 그 흥분을 에워싼 동리 아이들 앞에서 재현하는 이야기꾼이 되곤 했다 아직 글을 다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