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독후감·책·영화·논평

[영화]한 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영화 <미스 포터>

석전碩田,제임스 2007. 1. 28. 00:39

미스 포터 (Miss Potter)를 보고 / 1. 27.(토) 종로3가 단성사, 러닝타임 92분

오늘 아름다운 영상과 한편의 멋진 풍경화가 있는 서정성 있는 영화, ‘미스 포터’를 보고 오랜만에 잔잔하게 가슴따뜻 해지는 행복을 맛 보았습니다.

베아트리스 포터(Beatrix Potter)(르네 젤웨거)는 동화작가로 32세의 ‘노처녀’입니다. 그는 부모님의 유산으로 비교적 별 걱정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림(동물이야기)을 그려왔는데 번번이 출판사에서 책의 출판을 거절 당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그녀의 작품을 받아주는 곳을 만납니다. 그녀의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 출판사의 내부 사정 때문에, 출판사 현장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막내 동생(이완 맥그리거)에게,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일(포터의 그림 동화를 출판하는 일)거리를 줘서 결국 일하는 걸 단념하게 하려는 음모(?) 덕분이라고 얘기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포터는 ‘노먼’이라는 신출내기 편집자(Ewan Mcgregor)를 만나게 됩니다. 아무도 자신의 작품에(심지어 부모님조차도) 시큰둥한데 노먼은 그녀의 작품 뿐 아니라 첫 만남에서 포터를 좋아하게 됩니다. 처음엔 그냥 잘 보이기 위한 태도인 줄 알았는데 점점 진정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인정하고 좋아하는 노먼에게 포터도 점점 빠져듭니다. 결국 영혼이 통한 두 남녀, 포터와 노먼은 사랑을 하게 됩니다. 포터의 방에서 ‘뮤직 박스’를 두고 춤추는 장면은 요즘과 같은 인스턴트 사랑이 넘치는 상황에서는 보기 드물게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물론 다소 유치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1900년대 초 영국 사회의 귀족들의 생활상과 사고방식, 그리고 경솔하지 않은 영국 영어의 근엄함을 엿볼 수 있어 특히 좋았습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바라보면 고리타분하기까지 한 영국 상류사회의 생활방식과 꿈과 이상을 갈구하면서 자신만의 톡특한 세계를 펼치고 싶어하는 한 사람 포터의, 자유를 향한 삶의 방식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 이 영화의 큰 줄기라는 사실을 놓친다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영화의 대사 중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 앞에서 포터가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까짓 귀족뭐가 그리 자랑스러워요? 아버지가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똑같이 장사꾼이었을 집안이잖아요. 또 외할아버지 직업도....”라면서 격앙된 어조로 당당하게 출판계통 집안인 노먼을 두둔하는 장면입니다. 전형적인 영국 상류 사회의 안방 마님 역할을 하는 어머니가 하도 ‘신분 차이’를 강조하니까 포터가 당시 천한 직업으로 천대받는 출판업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장면입니다. 그녀에게는 순수한 이상과 꿈을 실현하는 것이 더 귀하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영화 내내 어머니와 미스 포터 사이에서 흐르는 갈등이 이 영화의 큰 줄기가 되는 셈입니다.

색 하나하나에도 고심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책에 대한 애정과 정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처음 책을 만들면서 노먼과 함께 인쇄소에 갔던 장면에서는 영화를 보면서 객석에 그냥 앉아 있는 게 아니라 함께 그 시절의 인쇄소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책을 출간하게 된 기쁨으로 그 시절 꽉 막힌 예의범절의 갑갑함에도 공원을 가로지르며 마차를 달리면서 기쁨을 폭발시키던 장면에서, 또 책방에서 포터의 책을 사 들고 들어온 아버지가 아내 앞에서 포터의 책이 어떤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며, 대견한 딸이라며 격려해 주던 장면에서는, 포터와 똑 같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건 이 영화의 또 하나의 보너스라고나 할까요. 노먼과의 결혼을 선언한 딸에게 흔쾌한 승낙을 하기 싫어 포터의 부모는 ‘3개월간’ 떨어져 있어볼 것을 조건으로 제안합니다. 이 제안을 듣고 포터는 어린 시절 꿈을 키워 준 고향 마을의 아름다운 전원지역으로 잠시 쉬러 갑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포터가 들은 소식은 하필 그 (떨어짐) 기간에 노먼이 죽었다는 비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비보를 접한 포터의 절망 조차도 이 영화는 시끌벅적하게 묘사하지 않고, 그녀가 사랑하는 동물 스케치들의 일그러진 형상으로 표현하는 세심함을 보여 줍니다.

결국, 불행을 뒤로 하고 포터는 진정한 ‘홀로서기’를 감행합니다. 그녀가 알아본 결과 그녀의 재산은 ‘평생 쓸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출판된 자신의 책에 대한 인세였지요. 이 후의 영화는 그 후 그녀의 작품 활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홀로서기로 정착한 고향 마을 레이크 지역의 아름다움이 당시 한창 개발 붐 때문에 훼손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녀의 순수한 마음과 노력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는 듯 합니다.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와 시대의 규율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예술가. 시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가의 안타까운 사랑. 대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예술가의 독창적인 상상력과 화풍. 현재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캐릭터 피터 래빗, 제미마 퍼들덕, 티기 윙클부인, 넛킨의 탄생 비화.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작가로서의 고집까지. 영화 [미스 포터]가 들려주듯, 베아트릭스 포터의 삶은 시대와 갈등하지만 끝내 그 시대를 껴안은 훌륭한 예술가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피트래빗 씨리즈의 저자인 실존 인물 '베아트릭스 포터'를 100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상큼하게 다시 만날 수 있는 영화, [미스 포터]를 강력히 추천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