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隨筆 · 斷想

노인성 엷은 치매, 그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석전碩田,제임스 2025. 11. 15. 21:16

제, 페이스북에 올라온 조광호 신부의 글입니다.

광호 신부님은 인천 가톨릭대를 정년 퇴임한 후 현재 강화 동검도에서 은퇴 후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국대학 미술디자인계열 학장 협의회를 창립하기 위해 사무국장으로 열심히 봉사할 때 당시 인천 가톨릭대 미술대학장이셨던 조광호 신부를 저는 처음 만났고, 그 후 퇴직 후 강화 심도학사에서 고(故) 길희성 교수님 때문에 또 만날 수 있었습니다.

끔 페이스북에 올리는 그의 글들이 그냥 놓치고 지나가기엔 아까운 글들이 많은데, 특히 어제 올리신 이 글은 120% 공감 가는 글이라 조금 길지만 이렇게 공유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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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그림자 -  노인성 엷은 치매

- 조광호

젊은 시절 , 나는 '어르신들은 왜 같은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실까'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를 처음 말하는 듯 언제나 되풀이 하시는 노인들의 모습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도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제 나 또한 그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문득 자신을 살펴보면, 내 안에서도 그런 징조가 보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이미 말했던 생각을 또다시 정리하며, 무심코 과거의 장면 속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노인성 엷은치매의 그림자는 잘 볼 수 없는 하얀 그림자 같습니다. 이제 이 그림자를 눈여겨 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하는 사실이 나를 조용히 긴장하게 합니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반복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삶의 무게와 세월이  남긴 문신같은 혼의 흔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그 반복이 성찰과 의미의 갱신 없이 이어질 때, 그것이 서서히 정신의 경직, 나아가 영혼의 닫힘으로 변해가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노년의 반복에는 어쩌면 내 존재에 대한 까닭 모를 불안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직 의미 있는 사람인가’, ‘나를 기억해주는 이가 남아있을까' 그 불안이 무심히 자랑으로, 혹은 억울함으로, 때로는 오래된 원망의 언어로 되살아나곤 합니다. 그런 말들은 처음엔 따뜻한 회상처럼 들리지만, 자주 되풀이되면 어느새 자기 확인의 딱하고 가여운 독백으로 변해갑니다. 그때의 반복은 더 이상 삶의 해석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자아를 붙잡으려는 처절한 심리적 몸부림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반복은 점차 기억을 응고시키고,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여지를 닫아버립니다. 마음의 문이 좁아지고, 판단은 단선화되며, 타인의 말이 귀에 닿지 않습니다. 결국 아무도 막아낼 수 없는 옹고집. 꼰대가 되어, 대화는 흐름을 잃고, 철벽같은 독백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 상태는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운 인간관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쉽게 이 문제를 풀수없는 난처한 양심의 줄다리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치매의 전조, 혹은 정신의 유연성을 잃어가는 매마르고 외로움을 타는 - 엷은 치매의 징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인성 엷은 치매는 단지 뇌의 질병이 아니라, 의미를 잃은 반복이 깊어져 관계가 단절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입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말은 더 이상 타자에게 닿지 않고 자신의 기억 속을 되돌며 맴돕니다.

신앙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하느님의 새로운 말씀을 들을 귀를 잃은 영적 귀먹음의 상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새롭게 말씀하시지만, 자신의 어제 말을 되풀이 하는 영혼은 그분을 ‘과거의 신’으로만 머물게 할 것입니다. 그때 신앙은 생명의 흐름이 아니라, 습관화된 종교적 반복으로 굳어질 위험이 있는 듯합니다.

반복의 병은 망각에서 생긴다기보다,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일생을 살아온 습관과 무의식이 여과없이 나타나는 이 시기는 잊지 못해서라기보다 놓지 못해서, 과거를 바라 본다기보다 붙들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치유의 길은 잊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새롭게 해석하는 일일 것입니다.

노년의 반복이 은총으로 바뀌려면, 그 말이 집착의 되풀이가 아니라 감사의 되새김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의 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찾아내고, 그 기억을 오늘의 은총으로 다시 읽을 때, 반복은 병이 아니라 기도의 언어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와 열린 귀일 것입니다. 사람과의 대화,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처럼’ 듣는 마음. 이것이 굳어버린 영혼의 관절을 풀어주는 은총의 움직임이 될 것입니다. 과거를 붙잡은 손을 조용히 펴서 그 기억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면, 그 반복은 더 이상 폐쇄가 아니라 해방의 기도가 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그때 노년의 언어는 자랑이나 원망이 아니라, 감사의 고백으로 바뀔 수 있을 것 입니다. 단순한 잔소리나 습관처럼 보이는 이 반복의 긍정은 기억의 관조가될 것이지만 반복의 부정은 집착의 경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전자는 기도를 낳고, 후자는 병을 부릅니다.

노년의 지혜는 ‘많이 안다’는 확신이 아니라, ‘이제 들을 수 있다’는 겸손에서 자라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닫힌 입보다 열린 귀가, 자기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이 앞설 때, 늙음은 쇠락이 아니라 빛의 깊이로 무르익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반복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우리 모든 노인들의 새로운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반복이 집착으로 굳으면 영혼은 닫히지만, 감사로 승화되면 기도가 될 것 입니다. 결국, 노년의 품격은 무엇을 더 말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새롭게 들을 수 있느냐로 결정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