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삶
- 이장욱
막이 내려올 때는 조용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후의 해변이나
노인의 뒷모습 또는
혼자 깨어난 새벽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이었다.
요한의 목을 원하는 살로메였고
숲을 헤매는 빨치산이었다.
세일즈맨이 되어 핀 조명이 떨어지는 무대에서
독백을
여러분,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코가 큰 시라노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빨간 모자를 쓴 늑대는 밤마다 문을 두드리고
맥베스는 예언에 따라 죽어가는 것
추억에 잠겨 혁명을 회고하는 자들은 이미
혁명의 적이 된 자들이지.
겨울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영구 미제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예요.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
벌판을 떠돌겠지요.
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드라마틱한 삶이란 출장 일과 두 시간짜리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인데
카라마조프는 검은 피와 택하신 자들이라는 뜻인데
인형의 집에서는 드디어 노라가 뛰쳐나오고
에쿠우스의 주인공은 자신의 눈을 찌르며 외친다.
머리가 열 개인 말들이여, 눈이 백 개인 말들이여, 반인반마의 신들이여!
붉은 막이 등 뒤로 내려오자
나는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깊이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객석의 어둠 속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살인자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계간 <문학과 사회>(2022년 봄호)
- 시집 <음악집>(문학과지성사, 2024)
* 감상 : 이장욱 시인, 소설가, 평론가, 대학 교수.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2008년부터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014년 동국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으며 현재까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1994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 시인으로, 2005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문단에 나와 시와 소설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내 잠 속의 모래산>(민음사, 2002),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생년월일>(창비, 2011),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문학과지성사, 2016), <음악집>(문학과 지성사, 2024) 등이 있으며, 소설로는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 2005), <천국보다 낯선>(민음사, 2013), <고백의 제왕>(창비, 2010), <기린이 아닌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15),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문학동네, 2019), <캐럴>(문학과지성, 2021), <뜨거운 유월의 중독자들>(현대문학, 2024)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 평론집으로<혁명과 모더니즘>(랜덤 하우스코리아, 2005/2019 신판),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창비, 2005), 그리고 수필집 <영혼의 물질적인 밤>(2023)이 있습니다. 현대시학작품상, 문학수첩작가상,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어제부터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에서 갑자기 가을 냄새가 물씬 묻어납니다. 그야말로 극적(劇的)으로 새로운 계절이 다가온 듯해서 얼마나 행복한지요. 9월의 시작과 함께 마치 극적으로 새로운 계절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연극과 문학 속의 인물들을 소환해 내서 삶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극적인 무대’이자 한 편의 드라마로 은유적으로 노래한 이장욱 시인의 이 시를 한 번 꺼내 보았습니다.
‘막이 내려올 때는 조용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이었다.’고 시인은 삶의 마무리를 평화롭고 조용하게 맞이할 것을 꿈꿨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격렬하고 혼란스러운 무대 위의 인물로 남아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면서 노래를 시작합니다. ‘말의 눈을 찌르는 소년’은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희곡 <에쿠우스(Equus)>의 한 장면인데, 인간의 광기와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이요 삶은 고요하게 끝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극적이고 요동치는 ‘그 무엇임’을 암시합니다.
햄릿과 맥베스, 바냐 아저씨, 그리고 코가 큰 시라노, 살로메 등 연극과 소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소환되지만 이들은 모두 이야기 속에서 정해진 각본대로만 살다 간 배역들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여러분, 인생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정해진 플롯대로 흘러가는 작품과 달리,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추억에 잠겨 혁명을 회고하는 자들은 이미 / 혁명의 적이 된 자들이지. // 겨울 다음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 다음에는 / 영구 미제 살인 사건이 시작된다.’는 흥미로운 표현은, 혁명과 개혁을 꿈꾸며 일어났던 자들이 이미 ‘혁명의 적’이 되는 아이러니처럼, 우리네 삶과 역사는 늘 변절과 배신의 반복 속에서 진리는 의미를 잃었다는 냉소를 담습니다. 계절조차 순서를 어기듯이 흘러가고, 사건은 미제(未濟)로 남습니다. 막이 내리면 조용히 모든 게 끝나는 연극과는 달리, 인생의 본질은 항상 ‘미완(未完)’으로 남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결국 바냐 아저씨처럼 쓸쓸할 거에요 / 고도를 기다리며 영원히...자책하는 햄릿과 함께’ 인간의 부조리, 의미 없는 기다림, 죄책감 등을 상징하는 이들 주인공의 말을 빌려 결국 우리의 삶도 이처럼 끝없이 쓸쓸한 무대 위에서 반복되는 것임을 슬프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계절을 맞으면서 이 계절에는 어떤 이야기로 나의 무대가 채워질지 궁금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무대에 우리가 직접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인은 붉은 막이 내려오는 순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붉은 막이 등 뒤로 내려오자’ 관객의 박수 소리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객석의 어둠 속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살인자가 / 물끄러미 /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섬뜩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우리 삶의 무대가 아무리 화려했더라도 마지막에는 어둠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우리의 무대도 그렇게 마무리된다는 말입니다.
삶은 여전히 극적입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대사를 이어가듯, 우리 또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올 때 관객의 박수가 울려 퍼지고, 그 어둠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겠지만, 시인이 노래했듯이 그 순간까지 삶은 연극처럼 격정적이고 아름답게 이어질 일입니다.
지나간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그 폭염(暴炎)의 기세를 견디고 새로운 계절 가을을 온몸으로 맞는 무대가 펼쳐진 걸 축하합니다. 그리고 비록 완벽한 플롯은 없더라도 기쁨으로 극적인 삶을 채워나갈 수 있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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