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 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더 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 새소리 알은체 별처럼 시끄럽다
-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 비평사, 2000)
* 감상 : 문태준 시인.

1970년 경북 김천, 황학산 기슭 금릉군 봉산면 태화2리에서 태어나 김천고,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 그리고 일반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94년 <문예 중앙> 신인 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1984년 결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2005년 <미당 문학상>, 2006년 <소월시문학상>, 2014년 <서정시학 작품상>, 2018년 <목월문학상>, 2019년 <정지용문학상>, 2022년 <박인환상>, <김광협문학상>, 2024년 <무산문화대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 <맨발>(창비, 2004),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그늘의 발달>(문학과 지성사, 2008), <먼 곳>(창비, 2012),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2015),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아침은 생각한다>(창비, 2022), <풀의 탄생>(문학동네, 2025) 등이 있습니다.
1996년 불교 방송에 입사, 방송 프로듀서, 라디오 제작국장 등을 거쳐, 5년 전인 2020년 여름부터 제주 불교방송 총괄국장이 되면서 시인은 제주도 애월읍 장전리에 정착했습니다. 제주 생활 5년째를 맞는 올해, 그의 아홉 번째 시집 <풀의 탄생>(문학동네, 2025)과 제주도 삶의 일상들을 담은 에세이집 <꽃이 환하니 서러운 일은 잊어요>(마음의숲, 2025)를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발간하였습니다.
문태준 시인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2005년 그가 미당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세간에서 보인 반응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35세였던 그가 제5회 미당문학상에 선정되었다고 했을 때, 한 평론가는 ‘일대 파란’이라는 표현을 했고, 한 원로 시인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그의 수상 소식은 일대 파란이었고, 또 문단을 술렁이게 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요.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정현종 시인은 ‘천상 시인을 하나 만났다’고도 했습니다. 그의 첫 시집에 실린 박형준 시인은 문태준 시인의 시를 ‘제트기가 지나간 뒤의, 제트기가 남기고 간 구름 같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 기억이 납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 시를 특별히 꺼내 든 것은 이 시가 그의 등단 작품이면서 문태준 시인의 시가 얼마나 섬세하고 깊이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 주는 작품일 뿐 아니라, 그간의 제주살이를 일기처럼 써 내려간 시들로 가득 채운 시집 <풀의 노래>를 주문했는데, 마침 우편으로 도착 된 날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더위가 사라진다는 처서인 지난주 토요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처저 같지 않은 ‘처서’를 보내면서 가을을 노래하는 시인의 이 시가 자연스럽게 이번 주에 읽을 한 편의 시로 선택된 셈입니다.
24절기 중 입추(立秋) 다음으로 오는 가을에 해당하는 절기인 ‘처서(處暑)’는 단지 ‘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라는 단순한 의미를 뛰어넘습니다. 오죽했으면 ‘처서 매직(Magic)’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제아무리 찌는 듯한 폭염(暴炎)이 기세를 떨치다가도 처서만 되면 찬 가을바람이 불어 금새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절기입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삐뚤어 진다’는 속담도 처서만 되면 여름 더위가 물러나고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떨어지는 데서 비유된 말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처서 매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직도 늦더위가 더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 지구 온난화의 후유증이 무섭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 시는 처서 무렵 계절의 미세한 변화를 시인의 타고난 탁월한 감성으로 포착해 낸 시어(詩語)들로 가득합니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는 표현은 이즈음에 부는 바람의 감촉, 여운, 그리고 절기의 전율 같은 것을 너무도 생생하게 전달하는 감성 넘치는 시어입니다. 또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 그늘을 파댔다 /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라든지,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더 메고 간다기에 /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는 시어들은, 가을을 알리는 절기인 ‘처서’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 이 시기에, 화자(話者)의 내면에도 알지 못하는 어떤 쓸쓸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읽는 독자들로 상상하게 만드는, 섬세하고 공감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서(處暑)’ 즈음에 부는 가을바람의 낌새를 알아차린 주변의 정겨운 사물들을 그저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는 듯한데,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그 행간에서 시인이 계절의 변화가 단지 기온의 오르내림만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고요히 바꾸어가는 힘이라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합니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는 표현만으로 여름의 끝맺음은 한철의 고단함을 내려놓는 시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이기도 함을 표현하는 절묘한 시어입니다.
문태준의 시는 늘 그렇듯, 작은 순간과 계절의 감각을 붙잡아 그것을 우리의 마음과 연결시킵니다. 처서의 바람을 묘사하는 듯하다가도, 사실은 우리 삶 속에서 한 시절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새로 상재된 시집 속에 있는 시 두 편을 더 읽으며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잎사귀에 여름비가 올 때
- 문태준
잎사귀에 빗방울이 떨어지네
나의 여름이 떨어지네
빗방울의 심장이 뛰네
바라춤을 추네
산록(山綠)이 비치네
빗방울 속엔
천둥이 굵은 저음으로 우네
몰랑한 너와 내가 있네
잎사귀는 푸른 지면(紙面)
너에게 여름 편지를 쓰네
- 시집 <풀의 탄생>(문학동네, 2025)
귤꽃이 피는 동안
- 문태준
귤밭에
소금 같은 귤꽃이 피어
향기를 나눠주네
돌에게
새에게
무쇠솥 같은 낮에게
밤하늘에
그리고 내 일기(日記) 위에
귤꽃 향기를
마당 빨랫줄에 하얀 천으로 널고
귤꽃 향기를
홑겹 이불로 덮고
요로 깔고
귤꽃 향기처럼
나는 무엇에든
조용하게 은은하게
일어나고
- 시집 <풀의 탄생>(문학동네, 2025)
제주도에 다섯 해를 살면서 그 주변에서 건져 올린 삶 속의 시들로 가득 채워진 이번 시집은 마치 그가 시로 일기를 쓴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시인이 지금까지 꾸준히 자연과 내면의 세계를 탐색해 오면서 더욱 깊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제주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시들입니다. 시인은 요란하지 않게, 그렇지만 ‘푸른 지면(紙面)’ 위에 계절 따라 편지를 쓰는 여름 빗방울을 닮아, ‘귤꽃 향기처럼 / 나는 무엇에든 / 조용하게 은은하게/ 일어나’리라 노래하며, 세상을 향해 글 향기를 퍼뜨리라 다짐하고 있습니다. - 석전(碩田)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빈집 / 그 집 앞 - 기형도 (1) | 2025.09.10 |
|---|---|
| 극적인 삶 - 이장욱 (1) | 2025.09.03 |
| 섬집 아기 / 민들레 - 한인현 (1) | 2025.08.20 |
| 선풍기 / 슬픔에 대하여 - 유용주 (7) | 2025.08.13 |
| 고향 / 비닐하우스 - 조말선 (6) | 2025.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