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가는 날
- 안행덕
좁은 골목, 트럭 한 대
조비비듯 서둘러 빠져나가는데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가보다
희뿌연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골목길 모퉁이로 얼른 사라진다
방금 버려진 세간 살이 몇 개
휘청거리는 흙먼지에 감았던 눈을 뜨고
모퉁이로 사라지는 이삿짐 트럭을 바라본다
전신주 아래 버려진 저 고달픈 상처
가난을 물고 뜯은 흔적이 선명한 사기그릇 몇 개
아무렇게나 포개진 그릇, 통증처럼 이가 빠져있다
버려진 상처를 달래 주는지 서로 볼을 부빈다
둥글게 빈 밥사발
오래전 내가 파놓은 묘혈(墓穴) 같은데
별일 아니라는 듯 텅 빈 그릇에 눈부시게 채워진 햇살
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평생 주인의 밥상을 지켰을 저 빈 밥그릇
버려진 운명을 원망도 없이
하얀 여백에 쌀밥처럼 햇살을 가득 담고
고스란히 식탁에 오를 것 같다
- 시집 <비 내리는 강>(세종출판사, 2014)
* 감상 : 안행덕 시인. 1946년 7월 생. 호월(湖月)은 그녀의 호입니다. 2005년 <시와 창작>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굼꾸는 의자>(책나무, 2008), <숲과 바람과 시>(세종출판사, 2012), <삐비꽃 연가>(한국문학방송, 2014), <비 내리는 강>(세종출판사, 2014), <바람의 그림자>(한국문학방송, 2017), <빈 잔의 자유>(세종출판사, 2018) 등이 있고, 시조집(전자책) <노을 속으로>(한국문학방송, 2020), 시선집 <달빛을 등에 지고>(세종출판사, 2021)가 있습니다.
2008년 푸쉬킨 시문학상, 2009년 황금찬 시문학상, 2013년 송도해수욕장 개장 100주년 문예공모상 시 부분 수상하였으며, 2020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시 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마을에 사는 한 가정이 이사를 가고 난 후, 골목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 집의 세간 살이들을 보면서 느낀 소회를 노래한 시입니다. 아마도 이 시의 화자는 막 이사를 간 이웃의 저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 남겨진 세간만 봐도 그 집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꿰뚫어 보듯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신주 아래 버려진 저 고달픈 상처 / 가난을 물고 뜯은 흔적이 선명한 사기그릇 몇 개 / 아무렇게나 포개진 그릇, 통증처럼 이가 빠져있다 / 버려진 상처를 달래 주는지 서로 볼을 부빈다’는 부분을 읽으면, 세간 살이들을 노래했다기 보다는 그 가족의 고달픈 삶의 모습 그대로를 표현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눈에는 골목길을 흙먼지 일으키며 빠져 나가고 있는 트럭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을 것입니다. ‘조비비듯 서둘러 빠져나가는데 /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가보다 / 희뿌연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 골목길 모퉁이로 얼른 사라진다’
‘조비비듯’이라는 표현과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 골목길 모퉁이를 얼른 사라지는’ 트럭의 이미지는 삶이 뭔가 잘 풀리지 않아 조급해하면서 몰래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황망하고 조바심 가득찬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햇살을 받으며 옹기종기 버려져 있는 빈 밥공기 속으로 ‘눈부시게 채워진 햇살’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하얀 여백에 쌀밥처럼 햇살을 가득 담고’ 어딘지 모르지만, 다시 정착하는 그곳에서 풍성한 식탁이 꾸려지길 간절히 빌어 주고 있습니다.
이곳 연남동에서 살았던 지난 26년을 마감하고, 같은 서울이지만 도심에서 조금 멀어진, 북한산 아래 은평 뉴타운 폭포동으로 이사 가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 며칠 동안 이삿짐 정리를 하면서 느끼는 게 참 많았습니다.
강산이 두 번씩이나 바뀌는 동안 한 번도 이사를 해 보지 않아서 그런지 뭐가 이리도 구석구석 많은 잡동사니들이 숨겨져 있는지. 정리를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모두 필요해서 구입하거나 마련했던 물건일텐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 이렇게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이젠 새로운 걸 구입할 때에는 더 심사숙고해야겠다는 교훈도 얻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써 보지도 않은 채 연식과 모델이 바뀌어 버려지는 물건들도 수두룩합니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이런 상황을 노래한 시로는 서양화도 그리면서 시를 쓰고 있는 송태한 시인의 시가 제격일 듯합니다. 마치 한 편의 산문글을 읽듯이 읽혀지는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바로 저의 마음과 동일함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청춘만큼 절절했던 모나고 날 선 신조까지 / 이제 진정 송두리째 내려놓거나’ 아니면 스스로 ‘헐고 묵은 짐, 버려질 이삿짐이 되어’ 새로운 곳에선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 말입니다.
이사를 하며
- 송태한
이사를 하며 나는 몇 번을 놀랐다
저 많은 이삿짐들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가끔은 진귀한 골동품을 찾아낸 듯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고 문득 웃음을 흘렸다
바닥을 긁던 밥솥처럼
오랫동안 정들었던 살림이 있는가하면
한 번도 못쓰고 묵혀 둔 낚시용품까지
한때는 모두 애지중지 아꼈던 것들
없으면 못살 것 같던 마음들이
창고와 벽장 틈에서 마술 상자처럼 쏟아져
사다리에 실려 트럭으로 옮겨 타고 있었다
어떤 물건은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가워도 하고
때로는 가구 뒤편에서 빛바랜 책 묶음이
아직 살아있다고 외마디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가
손대면 다시 눈을 깜빡이는 추억처럼
소싯적 핏대 세우며 굽히지 않거나
청춘만큼 절절했던 모나고 날 선 신조까지
이제 진정 송두리째 내려놓거나
내 몸으로부터 멀찌감치 작별해야할
헐고 묵은 짐, 버려질 이삿짐이 되어버려
나는 세간 사이에서 남몰래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 시집 <퍼즐 맞추기>(천년의 시작, 2016)
정년, 그리고 이사. 저로서는 짧지 않은 기간에 삶에서 나름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늘 기도해왔듯이 물 흐르듯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어 감사할 뿐입니다. 마지막 8월 한 달은, 새로운 곳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