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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가는 날 - 안행덕 / 이사를 하며 - 송태한

석전碩田,제임스 2022. 7. 27. 06:23

이사 가는 날

- 안행덕

좁은 골목, 트럭 한 대
조비비듯 서둘러 빠져나가는데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가보다
희뿌연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골목길 모퉁이로 얼른 사라진다

방금 버려진 세간 살이 몇 개
휘청거리는 흙먼지에 감았던 눈을 뜨고
모퉁이로 사라지는 이삿짐 트럭을 바라본다
전신주 아래 버려진 저 고달픈 상처
가난을 물고 뜯은 흔적이 선명한 사기그릇 몇 개
아무렇게나 포개진 그릇, 통증처럼 이가 빠져있다
버려진 상처를 달래 주는지 서로 볼을 부빈다

둥글게 빈 밥사발
오래전 내가 파놓은 묘혈(墓穴) 같은데
별일 아니라는 듯 텅 빈 그릇에 눈부시게 채워진 햇살
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평생 주인의 밥상을 지켰을 저 빈 밥그릇
버려진 운명을 원망도 없이
하얀 여백에 쌀밥처럼 햇살을 가득 담고
고스란히 식탁에 오를 것 같다

- 시집 <비 내리는 강>(세종출판사, 2014)

* 감상 : 안행덕 시인. 1946년 7월 생. 호월(湖月)은 그녀의 호입니다. 2005년 <시와 창작>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굼꾸는 의자>(책나무, 2008), <숲과 바람과 시>(세종출판사, 2012), <삐비꽃 연가>(한국문학방송, 2014), <비 내리는 강>(세종출판사, 2014), <바람의 그림자>(한국문학방송, 2017), <빈 잔의 자유>(세종출판사, 2018) 등이 있고, 시조집(전자책) <노을 속으로>(한국문학방송, 2020), 시선집 <달빛을 등에 지고>(세종출판사, 2021)가 있습니다. 

2008년 푸쉬킨 시문학상, 2009년 황금찬 시문학상, 2013년 송도해수욕장 개장 100주년 문예공모상 시 부분 수상하였으며, 2020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시 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마을에 사는 한 가정이 이사를 가고 난 후, 골목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 집의 세간 살이들을 보면서 느낀 소회를 노래한 시입니다. 아마도 이 시의 화자는 막 이사를 간 이웃의 저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 남겨진 세간만 봐도 그 집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꿰뚫어 보듯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신주 아래 버려진 저 고달픈 상처 / 가난을 물고 뜯은 흔적이 선명한 사기그릇 몇 개 / 아무렇게나 포개진 그릇, 통증처럼 이가 빠져있다 / 버려진 상처를 달래 주는지 서로 볼을 부빈다’는 부분을 읽으면, 세간 살이들을 노래했다기 보다는 그 가족의 고달픈 삶의 모습 그대로를 표현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눈에는 골목길을 흙먼지 일으키며 빠져 나가고 있는 트럭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을 것입니다. ‘조비비듯 서둘러 빠져나가는데 /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가보다 / 희뿌연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 골목길 모퉁이로 얼른 사라진다’

‘조비비듯’이라는 표현과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 골목길 모퉁이를 얼른 사라지는’ 트럭의 이미지는 삶이 뭔가 잘 풀리지 않아 조급해하면서 몰래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황망하고 조바심 가득찬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러나 시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햇살을 받으며 옹기종기 버려져 있는 빈 밥공기 속으로 ‘눈부시게 채워진 햇살’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하얀 여백에 쌀밥처럼 햇살을 가득 담고’ 어딘지 모르지만, 다시 정착하는 그곳에서 풍성한 식탁이 꾸려지길 간절히 빌어 주고 있습니다.

곳 연남동에서 살았던 지난 26년을 마감하고, 같은 서울이지만 도심에서 조금 멀어진, 북한산 아래 은평 뉴타운 폭포동으로 이사 가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최근 며칠 동안 이삿짐 정리를 하면서 느끼는 게 참 많았습니다.

산이 두 번씩이나 바뀌는 동안 한 번도 이사를 해 보지 않아서 그런지 뭐가 이리도 구석구석 많은 잡동사니들이 숨겨져 있는지. 정리를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모두 필요해서 구입하거나 마련했던 물건일텐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다 이렇게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이젠 새로운 걸 구입할 때에는 더 심사숙고해야겠다는 교훈도 얻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써 보지도 않은 채 연식과 모델이 바뀌어 버려지는 물건들도 수두룩합니다. 

사 준비를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이런 상황을 노래한 시로는 서양화도 그리면서 시를 쓰고 있는 송태한 시인의 시가 제격일 듯합니다. 마치 한 편의 산문글을 읽듯이 읽혀지는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바로 저의 마음과 동일함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청춘만큼 절절했던 모나고 날 선 신조까지 / 이제 진정 송두리째 내려놓거나’ 아니면 스스로 ‘헐고 묵은 짐, 버려질 이삿짐이 되어’ 새로운 곳에선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 말입니다.

이사를 하며

- 송태한  

이사를 하며 나는 몇 번을 놀랐다
저 많은 이삿짐들이 어디서 튀어나왔을까
가끔은 진귀한 골동품을 찾아낸 듯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만지작거리고 문득 웃음을 흘렸다
바닥을 긁던 밥솥처럼
오랫동안 정들었던 살림이 있는가하면
한 번도 못쓰고 묵혀 둔 낚시용품까지
한때는 모두 애지중지 아꼈던 것들
없으면 못살 것 같던 마음들이
창고와 벽장 틈에서 마술 상자처럼 쏟아져
사다리에 실려 트럭으로 옮겨 타고 있었다
어떤 물건은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가워도 하고
때로는 가구 뒤편에서 빛바랜 책 묶음이
아직 살아있다고 외마디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가
손대면 다시 눈을 깜빡이는 추억처럼
소싯적 핏대 세우며 굽히지 않거나
청춘만큼 절절했던 모나고 날 선 신조까지
이제 진정 송두리째 내려놓거나
내 몸으로부터 멀찌감치 작별해야할
헐고 묵은 짐, 버려질 이삿짐이 되어버려
나는 세간 사이에서 남몰래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 시집 <퍼즐 맞추기>(천년의 시작, 2016)

년, 그리고 이사. 저로서는 짧지 않은 기간에 삶에서 나름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늘 기도해왔듯이 물 흐르듯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어 감사할 뿐입니다. 마지막 8월 한 달은, 새로운 곳에서 출퇴근을 하면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