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정읍별사 2 - 박정만

석전碩田,제임스 2025. 5. 21. 06:00

정읍별사井邑別詞 2

- 박정만

민들레 작은 꽃씨 하나가
만리 허공 밖을 헤매이다가
어디메 묵정墨井밭에 떨어져서
눈부시게 눈부시게 피어나거든
그게 바로 너인가고 여길지니

내 가슴 한편에
봄 꿈 함께 꾸듯 그렇게 누워 있다가
바람 자고 운우雲雨 잘 내리거든
찬란한 사랑의 꽃말 마구
퍼뜨려놓고, 퍼뜨려놓고, 퍼뜨려놓고,

날아가라, 적막한 사월의 뜰,
인생의 싹수 노오랗게 사라진 대지 끝으로.
간혹 부질없는 목숨이 금단추같이 피어
길섶에 주저앉아 울음 울거든
그것이 또한 싹수 노오란 나인 것을.

인생은 저마다 외로운 섬과 같은 것,
안개 속에 가뭇없이 사라져서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흘러가는 곳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해도
점점점...... 사라진다 해도......

- 박정만 시집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5象, 1986)

* 감상 : 박정만 시인.

1946년 8월 26일, 전북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에서 출생하여 전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 속의 봄 이야기'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문화공보부 문예작품 공모에 시 '등불설화', 동화 '봄을 심는 아이들'이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학원출판사 편집부장을 지냈고, 이어서 월간문학사와 출판사 고려원에서 편집부장을 지냈습니다.

1979년 첫 시집 <잠자는 돌>(고려원, 1979)을 발간하였으며 이어서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5像, 1986), <서러운 땅>(문학사상사, 1987), <저 쓰라린 세월>(청하, 1987), <무지개가 되기까지는>(문학사상사, 1987), <혼자 있는 봄날>(나남, 1988), <어느덧 서쪽>(문학세계사, 1988), <슬픈 일만 나에게>(평민사, 1988) 등을 냈고 유고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실천문학사, 1988)이 있습니다.

인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시와 평론을 쓰는 중앙대 문예창작과 이승하 교수가 그의 저서 <詩 어떻게 쓸 것인가?>(건강신문사, 2017)에도 수록했고, 오래전 자신의 블로그에 시인에 대해 썼던 글을 얼마 전 12.3 비상계엄 선포라는 희대의 블랙 코메디 같은 불행한 사건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그에 대해서 언급하며 자신의 블로그(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shpoem&tab=1)에 올린 박정만 시인에 대한 글로 대신할까 합니다. 박정만 시인의 시를 여러 편 소개하며 쓴 글이어서 그의 시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박정만, 절망의 끝에 있는 희망을 믿고 산 시인]

아픔이 꽃피운 시들

제 자신도 마음이 아프거나 몸이 괴로울 때 시가 잘 써집니다. 마찬가지로, 비교적 평온하게 하루를 보낸 날은 시상을 떠올리지 않고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박정만은 고문의 후유증도 심했지만 영문도 모른 채 당하고 나온 뒤에 억울함 때문에 깡술로 몸을 망가뜨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생의 말년에 눈부신 시들을 남겼습니다. 아팠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인이여, 그대 자신 아프지 않다면 남의 아픔을 나누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리운 사람

- 박정만

그리움이여, 그립고 서럽다.
사람 사는 일에 큰 산 하나를 대어
그리움 없어지면 산을 볼 일이다.

그러나 이 땅의 일 없어지면
하나의 큰 길과 숲을 사랑하시고
이 세상의 먹구름도 부단히 살펴보시라.

꿈 없는 꿈 가운데 나를 버리지 말고
저문 저자거리에 눈물로 나를 놓아라.
생 하나 없을 때 생을 찾을 일이니
생 없어도 그것으로 한 생을 삼아라.

참으로 말하노니
기억하라, 고통과 슬픔의 때를.
일 없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너무 커서
눈물 너무 많았었음을.

아직도 더 많은 날을 가야지
홀로 있어도 언제나 죽어 살았다.
그래도 풀잎이 그리워 말을 못했지.
말은 못했어도 그리움의 기억은 있었다.

나의 하루는 늘 슬픔으로 강을 이루었다.
명목상으로 강을 이루고 슬픔을 이루는 강,
그 강도 필요했고 우울도 필요했다.
하지만 강은 느릅나무 숲이며 바다이다.

​우울과 정적이 함께 있는 바다,
그 바다를 위하여 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월과 중이염을 치유해 주는 시간,
그것이 내게 필요했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눈물의 가락으로.

그것을 나는 다시 본다.

- <혼자 있는 봄날>(나남, 1988)

고문 후유증을 술로 달래며 살아가자 아내가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갑니다. 아내가 사라진 뒤에 암담한 심정으로 쓴 시가 바로 '그리운 사람'입니다. '형편없는 시'에서는 아내의 이름이 염미혜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형편없는 시

- 박정만

철저하게 버림받고 철저하게 더렵혀졌지.
말해서 뭘해. 더러운 것은 난데.
나는 정말 말하겠어. 조심스럽게.
인간을 사랑하며 살려고 했지. 왜냐.
내가 인간이니까. 안됐고 더러웠어.
흥 불꺼진 포구 있지, 사람들이 많으니까.
뻑쩍지근하고 근사히지
사랑도 있고 낭만도 있어. 암 있고 말구.
난 한 번도 정직한 사랑을 한 적이 없어
내 사랑이 있었으니까. 우리 마누라인
염미혜가 바로 그녀야. 정말 그렇다니까.
그러나 이 말은 엉터리야.
시, 그것은 시 속에나 나오는 얘기지.

- <혼자 있는 봄날>(나남, 1988)

1987년 8월 20일 새벽 5시 5분 전에 탈고한 시입니다. 아내가 사라지고 없으니 아이들은 밥을 굶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딸을 본인이 근무했던 출판사 고려원으로 보내지요. 박정만의 딸이라고 하고, 아빠 시집 인세 앞당겨 달라고 하면 얼마 줄 거라고 말하면서. 정말 딸은 돈봉투를 받아와 아빠한테 내밉니다. 그 돈으로 박정만은 딸에게 쌀과 라면과 소주를 사 오게 했습니다.

시인이 고문을 당한 것은 1981년 5월이었고 숨을 거둔 것은 1988년 10월 2일, 마침 서울올림픽이 끝나던 날이었습니다. 잠실 운동장에서 폐막식이 거행되고 있을 때 시인은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홀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운동선수들과 올림픽 관계자들이 석별의 정을 나눌 때, 시인은 세상과 이별하고 있었습니다. 마흔세 살, 아직 정정한 나이였습니다. 제5공화국 정권 초기인 1981년 ‘한수산 필화사건’ 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 너무 심해 곡기도 끊은 채 미친 듯이 술을 마시며 열정적으로 시를 쓰다가(1987년 8월 19일부터 20여 일 동안 무려 300여 편의 시를 썼습니다) 짧은 시 하나를 유고시(遺稿詩)로 남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해지는 쪽으로

- 박정만

해 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
들판의 꽃잎은 시들고.

나마저 없는 저쪽 산마루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 유고시

​‘한수산 필화사건’이란 것의 실상은 대강 이렇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국가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자신한 신군부 세력은 누가 우리를 향해 험담을 하지 않나 노심초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중앙일보에 소설 '욕망의 거리'를 연재하고 있던 한수산은 ‘정부의 고위 관리’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을 비아냥거리는 내용을 썼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합니다. 고문기술자에 의해 물고문 · 전기 고문 · 엘리베이터 고문 등을 당하며 그런 소설을 쓰게 한 배후 인물을 대라고 추궁을 받자 한수산은 며칠 전에 술을 함께 마신 박정만의 이름을 댔고, 시인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여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초주검이 되어 나온 이후 박정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워찌 된 일이다요. 답답해 죽겄소. 이유나 알고 죽었으면 원이 없겄소."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요. 갑자기 어디론가 끌려가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끝없이 고문당하고 욕설을 들으면서 신문조서를 “다시 쓰라”고 채근당한다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면?

1946년 전북 정읍의 산골에서 태어난 박정만은 경희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에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장래가 촉망되는 시인이었습니다. 첫 시집 <잠자는 돌>을 발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인 1981년, 필화사건의 불똥이 튀어 그는 비참한 생을 영위해 나가게 됩니다.

진통제로도 다스릴 수 없는 온몸의 통증을 깡소주로 달랬으니 몸이 배겨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문 이후 사망할 때까지 7권의 시집을 내고, 그 밖에도 동화집과 수필집, 시화집을 내면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에게 시 쓰기란 고통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고 끔찍한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흐르는 눈물

- 박정만

마음에 시퍼런 독毒을 품고
자살하듯 술사발만 들이켜는 날

하늘엔 저승으로 가로놓인
애틋하고 선연한 서녘 무지개.

눈 시려, 눈 시려, 눈이 시려,
눈감고 눈을 감고 바라보는 맘.

내 피는 오금 박혀 가지 못하고
눈물만 저승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네.

1987년 8월에는 약 20일 동안 300편의 시를 쓰기도 했으니, 거의 신이 들려서 시를 썼다고 할까요. 편편의 시가 절규요 절창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끝 간 데까지 온 것을 짐작하고서 피를 토하듯이 시를 토했고, 그 시는 한 시인의 아물지 않은 상처의 기록이었습니다. 시인은 죽은 이후인 1989년에 현대문학상을, 1991년에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후략)

- <시詩 어떻게 쓸 것인가?>(건강신문사, 2017, 370〜375쪽)

늘 감상하는 시와 시인은 마흔두 살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박정만 시인입니다. 지난 주일 밤 11시 9분, 갑자기 이 세상과 영원한 작별을 고한 작은누나 장례식을 치르면서 계속해서 제 마음속에 맴돌았던 시였습니다. 너무도 아쉽고 아까운 나이에 떠났다는 공통점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시를 읽으면 아직도 ‘이게 정말인가?’ 반문이 될 정도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먹먹한 저의 마음을 대신해서 너무도 잘 표현해 주는 듯한 시이기 때문입니다.

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인생의 싹수 노오란’자인 자신과 ‘만리 허공 밖을 헤매이다가 / 어디메 묵정밭에 떨어져서 / 눈부시게 눈부시게 피어나’는 민들레 작은 꽃씨 하나를 대비시켜 통곡하며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는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옵니다.

생을 목회자의 아내로 살면서, 남들에게는 말 못하는 사연들을 혼자 감내하며 ‘적막한 사월의 뜰, / 인생의 싹수 노오랗게 사라진 대지 끝으로./ 간혹 부질없는 목숨이 금단추같이 피어 / 길섶에 주저앉아 울음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늘 제일 먼저 달려가 함께 울고 함께 웃어 주며 친구가 되어 주었던 착한 누나의 모습이 눈에 선(鮮)합니다. 조금 후에 발인하고 먼 길을 떠나고 나면, ‘내 가슴 한편에 / 봄 꿈 함께 꾸듯 그렇게 누워 있다가 / 바람 자고 운우 잘 내리거든 / 찬란한 사랑의 꽃말 마구 / 퍼뜨려 놓고, 퍼뜨려 놓고, 퍼뜨려 놓고’ ‘안개 속에 가뭇없이 사라져서 / 끝끝내 보이지 않는’ 누나가 자꾸만 생각나고 그리워질 것입니다.

디 고통 없는 그곳에서 안식하시길 이 시간 기도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