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기도 - 이성선 /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새해의 기도
- 이성선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 이성선 시전집(시와시학사, 2005)
* 감상 : 이성선 시인.
1941년 1월 2일 강월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속초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고려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했으며 졸업 후 수원 농촌진흥청에 입사하여 작물 시험반에서 콩을 연구했습니다.
1970년 <문화비평>에 ‘시인의 병풍’ 등 시 4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1972년 <시문학>에 ‘아침’, ‘서랍’ 등의 작품이 추천되면서 다시 한번 등단하였습니다. 그는 노장사상이 가미된 불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산과 달, 별 등 자연과의 교감을 추구하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향 고성의 동광 농업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1987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국어교육을 전공하였으며, 2003년 3월부터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 교수로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996년 속초, 양양, 고성에서 환경운동연합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원주 토지문화관 관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시집으로 <시인의 병풍>(현대문학사, 1974), <하늘 문을 두드리며>(전예원, 1977), <몸은 지상에 묶여도>(시인사, 1979), <밧줄>(창원사, 1982), <시인을 꿈꾸는 아이>(율도국, 1982),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오상사, 1985), <별이 비추는 지붕>(1987), <별까지 가면 된다>(1988), <새벽 꽃향기>(1989), <향기 나는 밤>(전원, 1991), <절정의 노래>(창비, 1991), <벌레 시인>(고려원, 1994), <산시>(시와시학사, 1999), <이성선 시전집>(시와시학사, 2005), <이성선 전집1, 2>(서정시학, 2011) 등이 있습니다.
강원도문화상(1988), 한국시인협회상(1990), 정지용문학상(1994), 시와시학상(1996)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1년 5월 4일 갑자기 향년 6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2002년 5월, 그의 사망 1주기 때 고향인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 그의 생가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2004년 숭실대 문예창작과에서 <시인 이성선>을 발간했습니다.
시인 반칠환은 이 시를 감상하며 이런 멋진 ‘시 같은 감상문’을 썼습니다.
[서두르다가 숨이 차서 멈추기 일쑤였지요. 흐린 눈동자 때문인 줄도 모르고 당신 가슴속 맑은 우물 긷지 못했지요. 비, 바람, 태양 없이도 나 홀로 꽃 피우는 줄 아는 우쭐한 나무였지요. 익숙한 덤불로만 숨는 낡은 몸짓의 새였지요. 고독이 두려워 시끄러웠고, 어둠이 싫어 부싯돌처럼 부딪치다 멍이 들었죠.
첫사랑 같은 첫해들 한 뭇 보내고 나서 기도합니다. 천천히 오래, 맑고 깊게, 감사하며 새롭기를, 찬란한 별보다 고독한 배후가 되어 가장 미약한 불빛조차 빛내어주기를, 가장 낮아서 온통 우러를 하늘 뿐이기를!](서울경제, 2016.1.5.)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2024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어떤 시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이성선 시인의 ‘새해의 기도’를 골라봤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우리가 겪고 있는 작금의 모든 일들이 그저 기도 없이는 좀처럼 안정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고 암울한 상황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아슬아슬 살얼음판을 걸어가는가 싶었는데, 한 해가 가기 전에 대형 항공기 참사까지 일어나 끝내 우리 모두를 극한 슬픔에 잠기게 했으니 말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 ‘새해의 기도’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는 ‘선지자적 대속(代贖)의 기도’처럼 메아리쳐 옵니다.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 높이 비상하며 /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시인의 간구가 눈물겹습니다. 주변의 온 세상은 다 무언가에 쫓겨 허둥대며 달려갈지라도 ‘새해엔 서두르지 않’고 ‘가장 고독한 길을 가’면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해달라고 부르짖는 시인의 기도가 서늘하게 다가오는 새해 아침입니다. 비루한 세상의 욕망과 헛됨에 눈이 먼 사람들은 시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하겠지만, 시인은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 나는 그 하늘 아래 / 아름다운 글을 쓰며 /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 나날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보잘것없다고 느껴지는 ‘시인’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가슴에서 물을 긷’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새해에는 결단코 서두르지 않고 하게 해달라고 다짐하며 올리는 기도입니다.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작가이면서 목사, 그리고 시인이면서 번역 문학가, 1964년 신춘 문예를 통해 등단한 동화 작가 등 그에게 붙는 호칭이 다양한 이현주 시인의 시중에서 새해 아침에 드리는 기도 시를 한 편 더 덤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이 시는 이성선 시인의 시에 화답하며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도 제목들입니다.
새해 아침의 비나리
- 이현주
새해 새날이 밝았습니다, 아버지
해마다 주시는 새날이 온 땅에 밝았습니다.
올해에는 하늘을 기르게 해주십시오
우리 몸속에 심어 주신 하늘 싹 고이 길러
마침내 하늘만큼 자라나
사람이 곧 하늘임을 스스로 알게 해주시고
칼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칼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시고
돈의 힘을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돈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시고
부끄러운 성공보다 오히려
떳떳한 실패를 거두게 하시고
유명한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착한 일 하다가 지친 이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을 가슴 깊이 파주시고
마음이 깨끗해서 슬픈 이들에게는
다함 없이 흐르는 맑은 노래 들려주시고
세상이 어둡다고 말하기 전에
작은 촛불, 촛불 하나 밝히게 하시고
솟아오른 봉우리를 부러워하기 전에
솟아오른 봉우리를 솟아오르게 하는
골짜기, 깊은 골짜기를 보게 하시고
밤하늘 별들을 우러르기 전에
총총한 별과 별 사이
가뭇없는 저 어둠, 어둠을 보게 하시고
아름다운 꽃 나비 벌 희롱하기 전에
뿌리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잎으로
숨어 흐르는 수액(樹液)을 보게 하시고
쓰러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대신에
길 떠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시고
올해에는 하늘을 품게 해주십시오
가슴마다 작은 가슴마다
우주만큼 큰 하늘을 품고
한 발 두 발 세 발
후회 없는 날을 걸어가게 해주십시오
새해 새날이 밝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 싹 마침내 온 누리 움텄습니다.
- 시집 <뿌리가 나무에게>(종로서적, 1989)
올해에는 ‘하늘을 기르게 해주십시오 / 하늘을 품게 해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는 시인의 노래가 이 새해 아침 저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읽고 또 저를 아는 모든 분들이 ‘가슴마다 작은 가슴마다 / 우주만큼 큰 하늘을 품고 / 한 발 두 발 세 발 / 후회 없는 날을 걸어가’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 한 해는 우리가 품은 ‘하늘 싹 마침내 온 누리에 움터’기를 소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