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가을의 연가(戀歌) / 강강술래 - 이동주

석전碩田,제임스 2024. 10. 23. 06:00

가을의 연가(戀歌)

 

- 이동주

 

가을은,

막연한 고향에

편지를 띄운다.

 

미웠던 사람까지도

비둘기를 날려준다.

 

가을은,

그림자는 하나지만

동행들이 많다.

 

낙엽이 스산한 길 위에

더운 꽃잎이 놓여 있고,

 

어둠 속

하나, 둘 불을 밝힌다.

 

이제는

알알이 구슬인 추억들...

 

이승에 있는 너와 나를

안개로 가렸지만

 

손을 흔들어

미소로 안녕!

 

가을에 속이 떨림은

인정에 주려서다.

진실로,

바람이 차면 이웃을 청한다.

(대한일보, 1965.10.26.)

 

- 시선집 <이동주 시선집 - 송영순 엮음>(현대문학, 2010)

 

* 감상 : 이동주 시인. 호는 심호(心湖).

1920년 2월 28일 전남 해남군 현산면 읍호리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의 방탕한 생활, 가문의 몰락, 그리고 외가인 공주로 보내져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어머니의 희생과 비극적인 가족의 상황 등을 겪으며 그는 이른 나이부터 문학에 심취하였습니다. 문학에 뜻을 두고 1940년 <조광(朝光)>에 ‘귀농’, ‘상열(喪列)’ 등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이 무렵 조지훈 시인의 ‘승무’을 읽고 매료되어, 그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에 1942년 혜화 전문학교 불교과에 입학하였으나, 급격히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0년 <문예>지에 ‘황혼’, ‘새댁’, ‘혼야’ 등의 시가 서정주 시인에 의해 추천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성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이후 원광대, 전북대, 성신여(사)대, 숭실대, 서라벌예대 등에 출강하기도 했습니다. 판소리, 민요, 산조 등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리듬과 가락을 우리말의 아름다움으로 묘사해 내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한국의 한(恨)의 정서를 전라도 가락에 실어 노래한 시편들로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잇는 시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집으로 <혼야>(호남 공론사, 1951), <강강술래>(호남 출판사, 1955)가 있으며, 시선집 <산조>(1979), 유고 시선집<산조여록>(1979)과 그의 시 98편과 그간 발행된 시집에서 누락 된 67편의 시를 함께 묶은 <이동주 시선집>(현대문학, 2010) 등이 있습니다. 수필집 <그 두려운 영원에서>, 소설 <빛에 싸인 문구>(문예비평사, 1979)가 있습니다. 1979년 1월 28일, 위암 수술 후 투병하다 향년 59세의 나이로 서울 은평구 역촌동 자택에서 타계하였습니다.

 

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가을을 노래하는 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짧은 가을을 아쉬워하는 때입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답다’고 노래한 유행가 노랫말처럼, 가을은 확실히 누구나 시인이 되게 만들고, 또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사랑을 하게 만드는 낭만의 계절인가 봅니다.

 

늘 감상하는 이 시는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 독자인 한 지인께서 며칠 전에 보내준 시입니다. 제목이 말해주듯,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이즈음에 애송하기에 꼭 맞는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동주 시인이 작고한 해인 1979년, 유고 시선집 <산조여록>에 그의 시들을 묶어 발표했음에도 여전히 누락된 시편 67편을 모두 찾아 2010년 <이동주 시선집>을 냈는데, 그때 시선집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진 시입니다.

 

인은 ‘가을은, / 막연한 고향에 / 편지를 띄’우는 계절이라고 노래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향’과 연관된 아득한 추억들, ‘이제는 / 알알이 구슬인 추억들...’을 떠올립니다.

 

인이 태어날 때만 해도 해남군 현산면에서 증조부와 조부 등 2대에 걸쳐 참판을 지냈던 사대부 집안이었지만 선친 대에서 급격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시인이 보통학교에 다닐 때는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궁핍해서 시인은 어머니의 친정인 공주로 와서 그곳에서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시인이 ‘막연한 고향’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런 개인적인 유년의 아픈 추억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는 구슬처럼 알알이 굳어져 버린 추억이지만, 그래도 가을이라는 계절은 ‘미웠던 사람까지도 / 비둘기를 날려’주고, ‘어둠 속 / 하나, 둘 불을 밝’혀 미소로 서로 손 흔들며 다정한 인사를 나누는, 멋진 계절이 가을이라는 것입니다. 또 부쩍 떨어진 기온 탓에 속이 떨려 온다면 그건 찬 바람 탓이 아니라 ‘인정에 주려서’이므로 ‘바람이 차면 이웃을 청하자’고 이 아름다운 가을의 연가(戀歌)로 삶의 길에서 만난 ‘동행들’을 모두 초청하고 있습니다.

 

가 그치자 바람이 차게 불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바람이 차면 이웃을 청하자’고 간절히 노래했던 이동주 시인을 생각하면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그의 대표작 ‘강강술래’를 감상하는 것은 그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인 듯합니다. 서로 손잡고 춤추는 여인의 모습을 은어 떼, 달무리, 공작 등에 비유하면서 강강술래 춤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시각적 이미지로 잘 보여주는 시입니다.

 

강강술래

 

- 이동주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白薔薇)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뉘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삐비꽃 : 띠의 어린 순. 띠는 원추형으로 자라며 그 밑동이 모여 있어 옹기종기 가지가 올라오는데, 시인은 강강술래의 둥근 모습을 삐비꽃에 비유함

* 뇌누리 : 물살, 소용돌이

* 상모 : 농악에서 모자 꼭대기에 흰 새털이나 깃 종잇조각을 달아 빙글빙글 돌리게 되는 것

 

- 시집 <강강술래>(호남 출판사, 1955)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인데, 그 질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다’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이 가을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친절을 베풀며 ‘미웠던 사람’에게도 ‘비둘기를 날려’보내면서 넉넉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 줄 일입니다.

 

‘이제 바람이 찹니다.....체온이 그리운 계절, 이런 세월을 살면서 / 나는 보낼 길 없는 편지를 / 밤마다 촛불을 밝히며 써야겠습니다 // 그리하여 나는 당신만을 위하여 / 시를 쓰겠습니다’ 노래한 나태주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가을날 아침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