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울게 하소서 / 그래도 봄을 믿어 봐 - 김형영
홀로 울게 하소서
- 김형영
저승길이 벌써 지난 듯하여
날마다 사는 게 부끄러운데
어디를 가나
융숭한 대접만 받으니
이대로 죽으면
하늘나라 못 가겠기에
유명해지려고
잊혀지지 않으려고
외로움을 이기려고
이리저리 어울리다가
눈곱만큼도
하늘엔 쌓은 것 없어
이제는 사는 것보다
죽기가 더 두려웁기에
오늘은
내 한 생의 문 걸어 잠그고
맨바닥에 엎드리오니
홀로 울게 하소서
- 시집 <홀로 울게 하소서>(열림원, 2000)
* 감상 : 김형영 시인.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지난 2021년 2월 15일 숙환으로 별세, 향년 77세.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소설가 김동리, 시인 서정주, 박목월, 김수영으로부터 시를 사사(師事)하였습니다. 1966년 <문학춘추> 신인상을, 그리고 1967년 문공부 신인 예술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강은교, 박건한, 석지현, 윤후명, 임정남, 정희성 등과 <칠십 년대> 동인지를 6집까지 내며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 후 2012년, 동인 활동을 재개하였으나 이름은 <고래>로 변경했습니다.
시집 <침묵의 무늬>(샘터사, 1973),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문학과 지성사, 1979), <다른 하늘이 열릴 때>(문학과 지성사, 1987),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문학과 지성사, 1992), <새벽달처럼>(문학과 지성사, 1997), <홀로 울게 하소서>(열림원, 2000), <낮은 수평선>(문학과 지성사, 2004), <나무 안에서>(문학과 지성사, 2009), <땅을 여는 꽃들>(문학과 지성사, 2014), <화살시편>(문학과 지성사, 2019) 등이 있으며, 시선집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문학과 지성사, 2005),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을>(문학과 지성사, 2021), 한영 대역 시집 <In the Tree>(the Ohil Univ. 2010)가 있습니다.
현대문학상(1988), 한국시인협회상(1993), 서라벌 문학상(1997), 한국 가톨릭문학상(2005), 육사시문학상(2009), 구상문학상(2009), 박두진문학상(2015), 신석초문학상(2016) 등을 수상했습니다. 시인은 1970년부터 월간 <샘터>를 발간해 온 샘터사에서 30여 년간 출판인으로 일하면서 시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천상(天常) 시인이었습니다.
지난 10일, 소설가이자 시인인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 자 대한민국은 남녀노소 누구 하나 예외없이 모든 국민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하기야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노벨 문학상 첫 수상자일 뿐 아니라, 노벨상 역사 123년 동안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 한강이 최초 수상자라니 그 의미가 더 큰 쾌거가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다음 날 한강 작가의 책을 사기 위해서 서점 앞에 장사진을 쳤고 그녀의 책은 순식간에 매진이 되어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책이 되었으니 그 열기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뭐니 뭐니 해도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뉴스’가 연일 대세입니다.
오늘 김형영 시인의 시를 함께 감상하려고 하는 것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한강이라는 빅뉴스가 전해 진 다음날, 페이스북에 한강 시인과 김형영 시인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올라온 글 하나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을 저도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기도 할 뿐 아니라, 특히 글의 내용이 한국의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너무도 경건한 문체로 써 내려간 ‘명문장’이어서 함께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김형영 시인이 어떤 시인인지 소개한다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10여 년 전 ‘전국대학 미술디자인계열 학장협의회’를 처음 조직할 때 사무국장 일을 맡았던 저와는 협의회 준비위원 중 한 사람으로 만난 적이 있는 필자는, 당시 인천 가톨릭대학교 미대학장이었습니다. 지금은 정년 퇴임 후 강화도 동검도에서 퇴직 후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가 지난 2021년 작고한 고(故) 김형영 시인을 추억하면서, 천국에 있는 그에게 노벨상 수상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편지글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문화일보> 어제 날짜(10월 15일자)에 ‘30년 전 한강의 재능 알아본 당신 그립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더군요.
*
천국에 계신 고(故) 김형영 시인께
김형, 오늘 동검도의 아침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높습니다. 천국에서도 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당신이 늘 자랑하던 소설가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기쁨을 오늘 아침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30여 년 전에 벌써 당신은 ‘한강’이라는 작가를 눈여겨보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특별한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시고, 살아생전 당신이 생애를 걸쳐 일했던 국민 잡지 <샘터>에서 그를 기자로 채용하고, 1999년 저희가 창간했던 문화 영성 잡지 <들숨 날숨>에 그의 작품을 앞세웠던 당신의 지혜와 격려는 놀라웠습니다. 당신의 안목과 선견지명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한강 작가의 남다른 예리한 시선과 진리와 진실에 임하는 그의 태도를 늘 주목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파헤치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숨겨진 진실을 드러낸다고 늘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술이 ‘진리의 드러남’이라면 한강의 작품은 인간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보편적이고 초월적 진실을 면면히 드러내, 엄중하고 세밀하게 알려 줍니다. 이 사실은 진리 앞에 그가 지닌 겸손하고 지순한 아우라와 그의 작품이 일치하고 있음을 저희는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작품인 것에 저희는 더 감동을 받습니다.
노벨 문학상은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으로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준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품의 문학적 품질, 독창성, 그리고 인류의 이해와 공감을 촉진하는 가치와 그 능력에 대한 격려와 찬사라고 생각합니다.
김형, 그녀의 작품 <채식주의자>는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 그리고 그에 따른 피폐 해 가는 인간성의 파괴를 예리하게 파헤칩니다. 이는 개인의 내면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와 그 안에 내재된 폭력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문학은 인간의 내면과 사회를 관통하는 진실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온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성찰을 이끌어 냅니다. 명징하고 예리한 통찰로 무장된 그의 뚜렷한 역사의식은 현대 우리 민족이 지닌 거대한 어둠 속에 숨은 폭력성을 진리의 빛으로 그 어둠의 실상을 여지없이 드러내어 치유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김형,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과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한국 문학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고, 한강 작가의 수상은 한국 문학의 다양성과 깊이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는 더 많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받고, 번역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김형, 살아생전에 당신이 늘 바라던 문학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도 더 높아지고, 문학을 통해 사회 문제를 성찰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랑하는 스테파노 인형(仁兄), 당신이 살아계셨다면 오늘은 어디선가 소주 한잔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형, 형이 늘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 사회의 폭력성은 더 깊어지고 더 잔인하게 우리의 삶 한복판으로 침투하고 돌진 해 오고 있습니다. 말과 언어의 폭력에서부터 생태에 대한 폭력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 교육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드러나게 때로는 은밀히 숨은 폭력이 우리 인간성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김형, 이러한 거대한 폭력의 문화에 대항하여 한강 작가의 작품이 다루는 주제들처럼 그 폭력성에 가장 연약함으로 그 거대한 힘 앞에 미력한 희생으로, 거대한 고함소리에 가장 낮은 목소리로, 폭풍 앞에 미풍으로, 휘황찬란한 뽐냄 앞에 지극한 겸손으로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짐으로 진리는 새싹을 틔우고 거대한 생명나무가 될까요?
김형, 나자렛 예수가 어찌하여 ‘야훼의 종“으로 더 낮은 곳으로 더 작은 곳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희생 되신 이 진리의 길이 우리 앞에 열려 가기를 김형, 천국에서도 기도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형,
그리하여 오늘 우리 사회는 물론, 각종 위기에 처한 인류 생존에 새 장을 열어 갈 수 있는 희망의 문을 열어 가도록 우리 함께 기도해요. 오늘 이 아침 천국에 보내는 나의 이 편지는 우표도 봉투도 필요 없어 당신의 그 넉넉한 미소에 이 글을 싣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우리 다시 만나요(조광호 신부)
*
오늘 감상하는 김형영 시인의 ‘홀로 울게 하소서’는 마치 자신의 이른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듯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드리는 기도 시입니다. 시인은 ‘날마다 사는 게 부끄’럽다고 노래하는 데, 그 이유는 ‘유명해지려고 / 잊혀지지 않으려고 / 외로움을 이기려고 / 이리저리 어울리다가 / 눈곱만큼도 / 하늘엔 쌓은 것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또 ‘어디를 가나 / 융숭한 대접만 받으’며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못내 부끄러워, ‘이제는 사는 것보다 / 죽기가 더 두려웁기에’ 오늘은 그저 맨바닥에 엎드려 ‘홀로 울게 하소서’라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조광호 신부의 글과 어딘지 모르게 그 결이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경건한 기도처럼 들리는 참회의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젊은 시절, 김형영 시인은 ‘조혈모세포 성장 기능 저하증’이라는 희귀 질병 때문에 악성빈혈로 투병하며 생애의 커다란 고비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병마와 벌인 고통스러운 긴 시간은 그로 하여금 카톨릭 신앙에 입문(스테파노)하도록 했고 가톨릭 문인회 회장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도 주었습니다.
지난 2021년 2월, 죽음을 앞둔 시인을 위해 문우(文友)들은 그가 쓴 시편 중에서 그가 직접 골라 준 시 130여 편을 한 권의 시선집으로 묶어 발간했습니다. 천국으로 떠나는 시인에게 바쳐진 마지막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을>(문학과 지성사, 2021) 속에 있는 그의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래도 봄을 믿어 봐
- 김형영
머지않아 닥칠지 몰라.
봄이 왔는데도 꽃은 피지 않고
새들은 목이 아프다며
지구 밖으로 날아갈지 몰라.
강에는 썩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은 누워서 떠다닐지 몰라.
나무는 선 채로 말라 죽어
지구에는 죽은 것들이 판을 치고,
이러다간
이러다간
봄은 영영 입을 다물지 몰라.
생명은 죽어서 태어나고
지구는 죽은 것들로 가득할지 몰라.
그래도 봄을 믿어봐.
- 시집 <화살 시편>(문학과 지성사, 2019)
-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을>(문학과 지성사, 2021)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기쁜 소식은 아마도 시인이 노래했듯이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따뜻한 햇살을 가져올 봄을 믿었던, 시인의 ‘믿음의 기도 덕분’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모쪼록,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얼어붙은 대지에 봄의 훈풍이 불 듯 이 땅에 ‘문학의 르네상스가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해 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