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이 오면 - 안도현
구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을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1991)
* 감상 : 안도현 시인. 1961년 12월 15일,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고 대구 대건고,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그리고 단국대학교에서 석, 박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중등학교 교사로 교직의 길에 들어섰지만, 당시 전교조 사건에 휘말리면서 6년여 해직 교사가 되었습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과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각각 ‘낙동강’,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로 당선, 등단한 이래 지금까지 100여 권이 넘는 시(선)집과 책을 낸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1996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1998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2002년 노작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2007년 윤동주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의 전북지역위원회 상임공동대표, 한국작가회의 소통위원회 위워장 등을 역임하였고 우석대학교를 거쳐 현재는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해 <모닥불>(창비, 1990),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1999), <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2002), <그리운 여우>(창비, 2000), <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1990),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2001),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2008), <북항>(문학동네, 2012),<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 2020) 등 지금까지 11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아마도 제 블로그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 코너에 소개한 시인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시인이 안도현 시인일 듯합니다. 검색을 해 보니 ‘너에게 묻는다’, ‘겨울 숲에서’,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 ‘재테크’,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등을 그동안 감상하고 그 감상문을 블로그에 올렸더군요.
오늘 감상하는 시는 제목으로 봐선 반드시 9월이 오기 전이거나 아니면 9월 초에는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꼭 제목이 ‘구월이 오면’이라고 해서 9월에만 읽어야 하는 법도 없고 또 제목에 얽매일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시는 그 시기를 초월하여 읽는 것이 훨씬 더 폭넓고 깊은맛을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는 시어들을 각 연에 조화롭게 배치하는 ‘이미지 연상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1연에서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청각)’와 ‘물결이 출렁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시각)’ - 2연의 ‘저희끼리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청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두를 아우르는 ‘사랑’과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로 확장되는 연상이 청각과 시각적인 이미지를 번갈아 가며 배치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호흡을 흐트러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우리들의 사랑’은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되어 구월의 온통 넓은 들판이 강물 하나로 금빛 세계가 되었듯이,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거대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따뜻한 피로 흐르는 세상, ‘인간의 마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 시가 꼭 9월에만 읽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의 제목 ‘구월’은 격랑의 파도와 비바람을 몰고 온 그 여름의 ‘그 미친 듯한 태풍’이 지나간 후 찾아온 가을의 초입, 즉 ‘내 인생의 구월’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제격입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세월이 지나고 이제 평온한 시간이 찾아온 때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불구대천지원수로 미워하고 질투하면서 마음이 요동쳤던 분노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차분히 모든 것을 포용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때’이기도 합니다. 구월이 오면 주변의 모든 이에게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 사람과 더불어 따뜻한 몸을 부대끼며 ‘그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시나브로 성찰의 시간, 사색의 계절, 구월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굳이 김현승 시인의 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를 일부러 꺼내 다시 읽지 않더라도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되겠다는 다짐과 기도가 저절로 되뇌어지는 9월의 아침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