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처서(處暑) / 풀벌레 소리 - 허형만

석전碩田,제임스 2024. 8. 21. 06:00

처서(處暑)

 

- 허형만

 

날벌레 낮게 낮게 난다

순식간에 날이 흐리고

앞산 중턱 소나무

검은 구름에 갇혔다

푸드덕, 지상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가

세찬 바람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구나

천상의 모든 생명들이

서둘러 흙으로 돌아오고 있구나

 

- 시집 <비 잠시 그친 뒤>(문학과 지성, 1999)

 

* 감상 : 허형만 시인.

1945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성신여자대학교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3년 <월간문학>을 통해 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집 <청명>(1978), <모기장을 걷는다>(오상출판사, 1985), <풀잎이 하나님에게>(영언문화사, 1986), <입맞추기>, <이 어둠 속에 쭈그려앉아>, <공초(供草)>(문학세계사, 1988), <진달래 산천>(황토, 1991),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한국문학, 1995), <비 잠시 그친 뒤>(문학과지성, 1999), <영혼의 눈>(문학사상, 2002), <첫차>(황금알, 2005), <눈먼 사랑>(시와 사람, 2008), <그늘이라는 말>(시안, 2010), <불타는 얼음>(고요아침, 2013), <가벼운 빗방울>(작가 세계, 2015), <황홀>(민음사, 2018), <음성>(언어의집, 2020), <만났다>(황금알, 2022) 등이 있습니다. 시선집으로 <새벽>, <따뜻한 그리움>,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문예바다, 2021), 그리고 평론집으로 <시와 역사 인식>(1988), <우리 시와 종교 사상>, <영랑 김윤식 연구>(1996), <문병란 시 연구>, <오늘의 젊은 시인 읽기> 등이 있습니다.

 

남 문화상, 우리 문학 작품상, 편운문학상, 한국 예술상, 한국시인협회장, 심연수 문학상, 펜문학상, 한성기 문학상, 광주 예술문화대상, 순천 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영랑 시문학상, 문병란 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중국 옌타이대학교 교환교수, 목포 현대시연구소 소장, 광주전남현대문학연구소 이사장, 한국 카톨릭 문인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국립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지난 2010년 정년 퇴임, 현재 명예교수입니다.

 

에도 기온이 섭씨 25도가 넘어가는 ‘열대야’ 현상이 오늘로 31일째 이어지고 있을 정도로 더위가 심상치 않습니다. 입추(立秋)가 지나고 처서(處暑)가 다가오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가을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올해 더위는 그칠 줄 모르고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매년 가족들이 모여 선산의 벌초를 양력으로 8월 15일 광복절 공휴일에 하던 것을, ‘더위가 한풀 꺾이면 하자’고 한 주를 미뤄 이번 주말에 하기로 약속을 해두었지만, 이런 기세라면 폭염(暴炎) 속에서 땀을 꽤 많이 흘려야 할 듯합니다.

 

서(處暑)는 24 절기 가운데 열네 번째 절기로 입추와 백로 사이에 있습니다. 처서가 되면 그렇게도 무덥던 무더위도 가시고 선선해지기 시작한다고 해서, 마법(魔法)을 뜻하는 영어 단어 ‘매직(Magic)’과 합성하여 ‘처서 매직’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할 정도로, 처서는 확실히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기점’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올해보다 더 심했던 폭염으로 기록된 지난 2018년, 꺾일 줄 모르던 더위가 그 즈음에 한반도로 올라온 태풍 ‘솔릭’에 의해 하루아침에 사라지면서 ‘처서 매직’을 연출한 적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폭염과 열대야가 사라지고, 푹푹 찌는 더위가 가라앉으며 밤낮으로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진정한 가을을 알리는 절기가 바로 처서였다는 말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시인이 ‘처서’라는 제목으로 노래했지만 정작 그 내용에 처서라는 용어도, 또 처서에는 계절이 어떻게 변한다는 둥 직접적인 묘사는 전혀 없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미 처서가 어떤 절기인지를 다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시적 화자(話者)는 한 계절이 가고 또 다른 한 계절이 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아쉬운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더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 무덥던 성하(盛夏)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처서(處暑) 즈음에 느껴지는 세월의 무상함이라고나 할까요.

 

인은 처서에 느껴지는 산들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날보다 / 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음을 절절히 느낀 모양입니다. 한여름 더위로 영글어진 만물들이 종국적으로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결실의 계절이 왔음을, ‘천상의 모든 생명들이 / 서둘러 흙으로 돌아오고 있구나’라고 표현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의 안목은 단순히 처서가 왔다는 사실을 넘어, 더 먼 곳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이 처서의 계절에 읽기에 안성맞춤인 허형만 시인의 재미난 시 하나를 더 감상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풀벌레 소리

 

- 허형만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중입니다

삐 소리가 나면

새벽 산책 중에 들었던 소리 중에서

가녈가녈한 풀벌레 소리만 입력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땅으로 되돌려 보내세요

먼 훗날 어느 새벽 별 하나 돋듯

고객님의 음성사서함이 켜지면

갈매빛 만만한 풀벌레 소리

비로소 가슴 적시는 사랑인 줄 알겠지요

 

- 시집 <눈먼 사랑>(시와사람, 2008)

 

을 산책길에서 들을 수 있는 풀벌레 소리를 현대 문명의 총아가 된 핸드폰이라는 문명 기기와 연결하여 노래한 발상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못해 ‘삐~’ 소리가 난 후에 메시지를 남겨 달라는 음성, 그리고 실제로 ‘삐~’하는 소리가 영락없는 가을 풀벌레 소리로 들리는 것 같은 참 예쁜 시입니다.

 

아침에도 태풍 종다리가 열심히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첫 뉴스로 접하게 됩니다. 몇 년 전 태풍 솔릭이 처서 매직을 우리에게 선사했듯이, 태풍 종다리도 그런 멋진 선물을 주고 물러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문득 귀뚜라미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