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목적 / 낮 동안의 일 - 남길순
여행의 목적
- 남길순
그것은 몹시 희박하다
어디니, 라고 묻자
화장실이야
다음 날 다시 묻는다
피곤해서 좀 쉬고 있어요
자다가
밥을 먹다
그럴거면 그 먼 데까지 여행은 왜 갔니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한다는 거
시간과 장소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거
모두에게 잊힌다는 거
흐르는 강물에
사람들이 엎드려 빨래를 하고 있다
때를 묻히고
다시 흔적을 지우고
빨래를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열심히 빨래를 하다가
물가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트럭이 지나간다
먼지를 들이마시며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흰 무덤이다
내려올 걸
그 높은 데는 왜 올라가니?
아무도 없는데 누가 묻는다
죽은 사람의 약력이 줄줄이 적혀 있다
-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창비, 2022)
* 감상 : 남길순 시인.
1962년 전남 순천 월등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천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12년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 <분홍의 시작>(파란, 2018), <호텔 순천만 – 디카 시집>(책 만드는 집, 2022), <한밤의 트램펄린>(창비, 2024) 등이 있습니다.
시인은 자녀 셋을 키워내고 중년의 문턱인 서른일곱이 되었을 때, ‘순천문학회’에서 개설한 문예 대학에서 시 강좌를 들으면서 시의 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인상을 마흔 살에 받으며 등단하였으니 ‘늦깎이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디카 시집을 펴냈지만, 그 이후 그녀의 삶 전체가 온통 시로 채워져 있을 정도로 지금 시와 열애 중입니다.
순천에서 나서 순천에서 평생을 살아온 ‘순천 사람 시인’이지만 올해 1월, 서울의 공신력 있는 출판사인 <창작과 비평사>에서 그녀의 두 번째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을 펴내면서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삶 속에서 찰나로 다가오는 시상(詩想)들을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해서 시 언어로 담아내는 그녀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일까요. 그녀의 시편들은 섬광처럼 다가온 것들을 순간적으로 잡아채서 장악하는 시적 감수성과 시인으로서의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소설가 김승옥과 동화 작가 정채봉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순천만 국가 정원 안에 2010년에 세워진 <순천 문학관> 문화 해설사로 근무하고 있는 시인의 시편들은 서울에서는 멀리 떨어진 ‘시간과 공간’인 시골 순천만의 자연을 그대로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그 시와 노래들은 삶의 정곡을 관통하는 울림이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지 뒤죽박죽인 듯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읽고 나면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로 죽비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곧 여행’이라는 시적 상상력에서 출발하고 있는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떠나온 여행, 즉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결론부터 말해 놓고 시작합니다. 그 목적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시인은 ‘그것은 몹시 희박하다’고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 데까지 여행 가는 일’, 그리고 ‘빨래를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열심히 빨래를 하다가 / 물가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일, ‘내려올걸’ 알면서도 그 높은데 꾸역꾸역 올라가는 일 등이 각기 다른 행위인 듯하지만, 시인은 동일한 시적 은유로 사용한 시어(詩語)들입니다. ‘죽은 사람의 약력이 줄줄이 적혀 있다’는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이 바로 그 힌트를 제공합니다. 무슨 대단한 목적지에 간 것처럼, 먼지를 일으키고 또 들이마시며 걷고 걸었지만, 모든 것들이 다 ‘죽은 사람의 약력’ 한 줄 더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섬뜩한 경고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트럭이 지나간다 / 먼지를 들이마시며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흰 무덤이다’라고. 말하자면,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삶’이라는 여행의 종착지가 결국 ‘무덤’이랍니다. 그것도 흰색으로 분칠을 한 ‘흰 무덤’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녀의 시집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읽고 또 읽으면서 ‘와,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창한 삶의 목적, 여행의 목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매일 매일 연락이 뜸해지지 않도록 사소한 안부를 묻는 일부터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 시를 몇 번 더 읽으면서 눈치챈 것입니다. ‘어디니, 라고 묻자 / 화장실이야 / 다음 날 다시 묻는다 / 피곤해서 좀 쉬고 있어요 / 자다가 / 밥을 먹다 / 그럴거면 그 먼 데까지 여행은 왜 갔니’
이 질문에, 이제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먼 데서도 여전히 똥은 싸야 하고 또 피곤하면 자야 하며,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지금 여기(Here & Now)에서의 관심과 소통, 그리고 어쩌면 그런 사소한 배려가 우리 ‘여행의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희박하지 않은 답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같은 시집에 수록된 시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 시는 문학관의 해설사로 일하는 시인이 ‘문학관’이라는 단어의 ‘관(館)’이 어느 날 문득 시체를 넣어두는 ‘관(棺)’이면 어떡하나 염려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시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문학’의 길로 들어 서서 시업(詩業)을 하는 시인으로 살아가면서,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 또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는’ 문학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동호씨지만, 그가 싣고 오는 상큼한 오이 냄새가 다가오면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오듯 모든 사람이 ‘지붕 아래 있어도’ 젖고 마는 그런 멋진 시를 써내는 시인이 되겠다고 당차게 다짐하는 시 같기도 합니다.
낮 동안의 일
- 남길순
오이 농사를 짓는 동호 씨가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온다
어떤 날은 한 아름 백오이를 따와서
상큼한 오이 냄새를 책 사이에 풀어놓고 간다
문학관은 날마다 그 품새 그 자리
한 글자도 자라지 않는다
햇빛이 나고 따뜻해지면
오이는 속도가 두 배 세 배로 빨라지고
화색이 도는 동호 씨는 더 많은 오이를 딴다
문학관은 빈손이라
해가 바뀌어도 더 줄 것이 없고
문학을 쓸고
문학을 닦고
저만치 동호 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갈대들 길 양쪽으로 비켜나는데
오늘은
검은 소나기를 몰고 온다
문학관을 찾은 사람들이 멍하니 서서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다
지붕 아래 있어도 우리는 젖는다
-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창비, 2022)
두 편의 시가 전혀 다른 시 같지만, 이렇게 동시에 읽고 나면 희한하게 시적 여운은 동일(同一)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죽은 사람의 약력을 줄줄이 써서’ 흰 무덤 앞에 세워 놓는 일이나, ‘문학관(文學棺)’을 만들어 자기 자랑만 열심히 쓸고 닦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건 우리가 ‘낮 동안에 해야 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더더욱 올바른 여행의 목적지를 향해 줄달음치는 일도 아닌 듯합니다.
비록 하찮은 듯하지만, ‘어디니’ 묻는 관심과 ‘화장실이야’ 답하는 관계, 그리고 날마다 문학관을 찾아와서 멍하니 서 있는 사람들을 푹 젖게 하는, 자전거 탄 동호씨처럼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고 싶어집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