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정희성과 정호승 / 어떤 비선(秘線) / 탈의나주(脫衣裸走) -고운기

석전碩田,제임스 2024. 7. 3. 06:00

정희성과 정호승
 
- 고운기
 
두 사람 다 시인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아니, 더러는 좀 설익기도 해서
정희성을 정호승으로 알고
정호승을 정희성으로 부르는 일도 생긴다.
 
비슷한 이름이라 그렇다 해도
 
정희성을 정희승이라거나
정호승을 정호성이라거나
신나게 헷갈린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정희성과 정호승이 살고
정희승과 정호성이 떠돌아다닌다
 
진짜와 유령의 공존
 
그러다 아예
정희성의 이름에 정호승의 약력이 붙고
정희성 시의 제목에 정호승의 시가 붙고
정희성의 1연에 정호승의 2연이 붙는다
 
거기서 더 기막힌 시가 나온다면?
 
드디어 유령은 시인으로 데뷔하여
어느덧 유령 시인이 한몫하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나는 어젯밤 정희성 시인과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 나눴는데
그는 정말 정희성이었을까
혹 정희승이 아니 정호성은 아니었을까.
 
- 시집 <구름의 이동속도>(문예 중앙, 2012)
 
* 감상 : 고운기 시인.

1961년 12월, 전남 보성 벌교에서 태어났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서울 숭문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일본 게이오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와 연세대, 목원대, 명지대 강사를 거쳐 현재는 한양대학교 국제문화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삼국유사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대에 재학 중이던 1983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서 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청하, 1987), <섬강 그늘>(고려원, 1995),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창비, 2001),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랜덤 하우스, 2008), <구름의 이동속도>(문예 중앙, 2012), <반쯤>(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문학수첩, 2017), <익숙해진다는 것>(시선사, 2019), <고비에서>(청색종이, 2023) 등 9권의 시집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와 관련된 교양서로는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월인, 2001),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현암사, 2002), <일연을 묻는다>(미래인, 2006), <길 위의 삼국유사>(현암사, 2006), <듕귁과 오뤤지>(샘터, 2008),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스토리텔링 삼국유사>(현암사, 2009),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현암사, 2010),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현암사, 2011),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현암사, 2012), <모험의 권유>(현암사, 2015), <모든 책 위의 책>(현암사, 2020) 등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번역서로 <삼국유사>(홍익출판사, 2001, 일연), <논어>(현암사, 2003, 시모무라 고진), <그늘에서>(눌와,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집, 2005)가 있으며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입니다.
 
운기 시인은 참으로 뜻밖에 알게 된 시인입니다. 수요일마다 저의 시 감상문을 읽는 구독자 중, 서울에 사는 고향 절친 하나가 “고등학교 동창회에 갔다가 시인이 된 친구를 만났다”면서 “시간이 되면 그 친구의 시도 한 번 소개해 주면 좋겠다”며 이름만 달랑 말해주었습니다. ‘고운기’, 처음엔 이름도 참 곱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의 시를 검색해서 몇 편을 읽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쉬운 시어(詩語)지만 읽고 나면 뭔가 여운이 남는, 그리고 우리 고전에서 갖고 온 텍스트에 시적 이미지를 덧입혀 우리 속에 흐르는 깊은 근본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시편들이 금방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시인이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으로 있었던 정희성 시인을 스승으로 모셨던 시인만이 노래할 수 있는 재미난 발상의 시입니다. 아마도 스승이었던 정희성 시인은 제자들과의 만남에서 유명인으로서 치러야 하는 별난 에피소드들을 가끔 말하곤 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어젯밤 정희성 시인과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 그는 정말 정희성이었을까 / 혹 정희승이 아니 정호성은 아니었을까’ 반문하는 그의 너스레가 참 기발하고 재미납니다. 그러니까 이 시의 내용 대부분은, 스승인 정희성 시인이 사석에서 말했던 내용이기도 한듯합니다. ‘정희성을 정호승으로 알고 / 정호승을 정희성으로 부르는 일도 생긴다’는 것인데, 비슷한 이름만 헷갈리는 게 아니라, ‘그러다 아예 / 정희성의 이름에 정호승의 약력이 붙고 / 정희성 시의 제목에 정호승의 시가 붙고 / 정희성의 1연에 정호승의 2연이 붙는’ 지경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도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인은 현재 가장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정호승’이라는 시인의 이름과 스승 ‘정희성’ 시인의 이름이 비슷한 것 때문에서 생기는 우스꽝스러운 상황, 그리고 SNS가 발달 되고, 언제든지 검색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부분과 전체를 자유자재로 따다가 붙일 수 있는 이 시대에는 ‘진짜와 유령의 공존’이 있을 수밖에 없고, 진짜를 가짜로부터 구별해 내는 것도 쉽지 않다고 실토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진짜일까’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 시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며 진짜 ‘시인 고은기’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는 시라는 말입니다.
 
단 40년, 그동안 고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은 누구인지, 또 시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에 진솔하게 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는 세 번째 시집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에서 ‘물고기를 해체 시키는 입과 배를 가진 사람보다 배와 창자로 맑은 물살을 흘려보내는 이가 되려는 꿈’을 노래하며,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곱 번째 시집인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가 2017년 발간된 이후, 작년에 여덟 번째 시집 <고비에서>가 나오기까지 6년, 그간 그는 간암 수술을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삶과 문학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독한 시간을 통해서 더욱더 이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답에 더 가까이 다가선 듯합니다.
 
에게, 아니 우리 각자에게 삶의 명령을 내릴 존재가 누구인지,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저마다 상상하도록 이끄는 ‘어떤 비선’이라는 시입니다.
 
어떤 비선(秘線)
 
- 고운기
 
어떤 블랙리스트에도 들지 않은
나는 완벽한 비선
저 교차하며 작성된 많은 리스트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고정간첩이 제 나라 정보부에게 잊히듯이
 
나의 정보부로부터 연락이 없다
나는 숨었는가 잊혔는가
바라건대, 누가 내게도 명령을 내려다오
 
- 시집 <고비에서>(청색종이, 2023)
 
해 전 문화계에서 ‘블랙리스트’라는 말이 등장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진영 논리에 의해서 이쪽저쪽 편 가르기를 할 때 사용되었던 슬픈 용어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어떤 블랙리스트에도 들지 않은 / 나는 완벽한 비선 / 저 교차하며 작성된 많은 리스트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다’고 자랑인지, 아니면 서글픈 고백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노라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나만의 길, 그 길을 묵묵히 걸어왔고 또 걸어가겠노라 굳게 다짐하는 시인의 마음이 엿보이는 듯합니다.
 
국유사를 전공한 최고의 권위자답게 고전 문학을 시와 연결시키는 시 작업이 어떠한지를 엿볼 수 있는 시 한 편을 더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으려고 합니다.
 
탈의나주(脫衣裸走) -삼국유사에서 3
 
- 고운기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황룡사 말단 스님 한 사람이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웬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기록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트리퍼,
탈의의 목적이 달랐을 뿐이다.
 
여름철 어느 날 태풍 주의보가 내렸다.
국회 앞 경찰 한 사람이 ‘중증 장애인에게도 일반 국민이 누리는 기본권을 보장해 달라’는 피켓을 든, 휠체어 탄 장애인을 보았다.
경찰은 ‘태풍 때문에 위험하니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인은 ‘담당하는 시간’이라며 거절했다.
가만히 뒤에서 우산을 들고, 아무 말 없이 태풍 속에 서 있었다.
 
하늘에서 왕사(王師)에 앉히라는 소리가 들렸다.
트위터에 경찰청장 시키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 시집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문학수첩, 2017)
 
‘겨울철 어느 날’과 ‘여름철 어느 날’,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대비시키며 ‘스트리퍼’ 즉 옷을 벗고 벌건 대낮에 달리는 사내의 이미지를 시 속으로 끌어와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뒤에서 우산을 들고, 아무 말 없이 태풍 속에 서 있는’ 그 젊은 경찰을 알아보고 ‘경찰청장’을 시키라는 목소리, 그리고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간’ 말단 스님을 ‘왕사(王師)에 앉히라’는 하늘의 소리가 마치 이 순간에도 들리는 듯합니다. 나보다 약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만 들을 수 있는 그 소리 말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