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 인연 - 피천득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득료애정통고 得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失了愛情痛苦 *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피천득 수필집 <인연>.(샘터사, 1996)
* 註 : ‘사랑을 얻고 나서도 마음이 아프고, 사랑을 잃고 나서도 마음이 아프다’라고 번역됨 직한 구절.
* 감상 : 피천득 수필가, 시인, 번역가.
호는 금아(琴兒)인데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서화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춘원 이광수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1910년 5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중국 상하이 호강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중국에서 공부하는 중 문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을, 1931년 ‘소곡’, 1932년 ‘가신 님’ 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1946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미시’를 강의하였습니다. 2007년 5월 25일 향년 97세로 별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2008년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입구에 <피천득 기념관>이 개관되어 그가 생전에 생활했던 방 그대로 인테리어하여 소지품, 귀중품 등을 그대로 보관 전시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서정시집>(상호출판사, 1947), <금아시문선>(경문사, 1959), <피천득 시집>(범우사, 1991), <생명>(샘터사, 1993), <삶의 노래>(1993) 등이 있으며, 1996년에 출간된 수필집 <인연>의 표제작인 ‘인연’이 각종 국어 교과서에 실려 독자의 호평을 받으면서 일약 ‘수필가 피천득’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시와 수필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는 명확한 정답이 없지만, 오늘 감상하는 피천득의 ‘오월’은 많은 사람에게는 ‘시’라고 알려진 ‘수필’입니다. 그의 수필집 <인연>에 수록되어 있지요. 이 수필을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에서 감상하기로 한 것은, 지난주에 함께 읽었던 권대웅 시인의 ‘나팔꽃’ 감상문을 읽고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답신으로 이 글을 보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삼천사 입구 북한산 둘레길을 소심이를 데리고 산책하면서 신록의 싱그러움과 만발한 꽃들에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내준 글이 ‘지금 이맘때를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즉석에서 친구에게 이 ‘시’를 다음 주에 함께 감상해 봐야겠다고 약속하는 답신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5월에 태어나서 5월에 떠난, 그래서 ‘영원한 5월의 소년’으로 불렸던 피천득 시인이 ‘5월’을 노래했으니, 그의 이 시를 이 계절에 읽는 것도 어쩌면 특별한 ‘인연’임에 분명합니다.
언뜻 보면 시인이 오월의 찬란한 신록의 자연을 노래한 것 같지만, 사실 한 발짝 다가서서 들여다보면 더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을 한 시인이 스물한 살의 나이에 비통한 마음으로 죽으려고 혼자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결행하지 못하고, 모래사장 위에 ‘사랑을 얻고 나서도 마음이 아프고, 사랑을 잃고 나서도 마음이 아프다’는 글귀만을 써놓고 ‘죽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떠날 때 보았던 5월의 신록과, 돌아온 후에 바라다본 신록은 변함이 없이 여전히 ‘싱그러움’ 그 자체라고 노래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은 어느새 많이 성숙해 있는듯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 ‘나이는 세어 무엇하리’ 노래하는 시인이 ‘이제 조금 있으면 성하(盛夏)의 계절 6월이 원숙한 여인처럼 다가올 것’이지만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고 쓸쓸하게 노래했듯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계절이 아쉬울 뿐입니다.
모란은 이미 지고 없지만, 그 자리에 작약이 화려하게 피어 있고, 또 앵두와 산딸기들이 빨갛게 이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5월의 장미는 또 어떤가요. 담장마다 형형색색 피어 있는 장미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자랑하는 듯 향기를 은은하게 풍기고 있고, 그 틈새에서 찔레꽃도 명함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묻어나는 쥐똥 나무꽃의 향기는 정신을 어질어질하게 할 정도입니다. 애기똥풀이 지고 난 자리에는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고, 이 계절에 혹시 자신이 잊혀질세라 밤꽃도 막 피기 시작했습니다. 민들레꽃, 매발톱꽃, 불두화, 붓꽃, 지칭개꽃, 금낭화, 패랭이꽃, 메꽃, 씀바귀꽃, 괭이밥꽃, 돌나물꽃, 채송화, 감꽃, 이팝나무꽃, 산딸나무..... 5월을 장식했던 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으로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계절의 여왕, 2024년 5월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시인이 말했듯이, 6월은 ‘원숙한 여인’처럼 무성한 녹음이 짙어지고, 또 작열하는 태양이 여름을 알리며 또 다른 꽃들을 피우겠지만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과는 사뭇 다를 것입니다.
피천득과 더불어 쌍두마차 수필가로 알려진 이양하는 그의 수필 ‘신록 예찬’에서 5월 신록을 ‘유년’이라 하면, 삼복염천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성하의 계절을 그의 장년 내지는 노년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피천득도 ‘5월’과 ‘6월’을 확연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이 닮아있습니다.
피천득의 유명한 수필 ‘인연’에는 아사코라는 일본 여자와 얽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꽤 긴 그 수필이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에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무슨 내용인지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필의 제목과 똑같은 ‘인연’이라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삶을 먼저 살다가 간 선배로서 그가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삶의 지혜를 요약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올해 ‘연초록 5월의 인연’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습니다. - 석전(碩田)
인연(因緣)
- 피천득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일 줄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들은
인연인 줄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고
현명한 사람은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을 살릴 줄 안다
살아가는 동안
인연은 매일 일어난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육감을
지녀야 한다
사람과의 인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인연으로 엮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