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비둘기 / 저녁에 -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산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월간문학>(1968년 11월호)
- 시집 <성북동 비둘기>(범우사, 1969)
* 감상 : 김광섭(金珖燮) 시인. 호는 이산(怡山).
1904년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성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중동학교, 일본의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27년 <해외 문학>, 1931년 <문예월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1939년에 발간된 첫 시집인 <동경(憧憬)>(1938)을 비롯,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이삭을 주울 때>(1965), <성북동 비둘기>(범우사, 1969), <반응>(1971), <김광섭 시전집>(1974), <겨울날>(1975) 등이 있습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중동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또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다 결국 1941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1944년 11월 30일 3년 8개월간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만기 출소한 후에는 조용히 지냈으나, 이듬해 광복이 되면서 민주일보 사회부장, 민중일보 편집국장 등을 거쳐 미군정청 공보 국장을 맡았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내다가 1951년 그 직을 사임한 후 대전에 있었던 대전신문사 사장을 역임했고, 1958년에는 세계일보 발행인이 되었습니다.
1961년 8월부터 1970년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77년 5월 23일, 지병인 뇌졸중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자유문협 위원장, 전국 문총 최고 위원 등을 지냈으며 서울시 문화상(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시인은 1961년부터 성북동에 거주하였는데, 이 시는 당시 근처에 있던 채석장과 성북동 일대가 개발되는 현장을 보면서 현대문명의 삭막함과 도시화로 인해 세속화되어 가는 주변을 안타까와하면서 노래한 시입니다. 성북동이 지금은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富村)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시가 씌여진 당시만 해도 서울도 아닌 변두리 지역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개발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없던 번지수가 새로 생겨나고 연일 채석장의 돌 깨는 소리가 마치 전쟁터처럼 들렸었나 봅니다.
시인은 1965년 4월, 동대문 서울야구장에서 야구 구경을 하다가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여러 해 병석에 있었는데, 아마도 이 기간 시인이 삶을 바라보는 안목에 큰 변화가 있었던 듯합니다. 초기에는 주권을 상실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좌절과 절망을 노래하며 정치의식과 민족주의 문학을 주창하는 시였다면, 그의 후기 시 작품들은 주로 지성과 감성을 잘 융합하여 삶을 관조하는 원숙한 작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는 인생, 자연, 문명 등 우리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작품들로 가득합니다.
오늘 감상하는 ‘성북동 비둘기’도 그의 후기작품 중의 하나로, 그의 나이 64세에 쓴 시입니다.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시어는 개발이 되어 주택들이 새로 들어섰다는 뜻이지만, 개발로 인한 자연의 파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 ‘번지가 없어졌다’는 시어는 비둘기들의 보금자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 ‘채석장 포성’ 등은 현대문명의 삭막함과 병폐를, ‘가슴에 금이 갔다’는 표현은 이러한 병폐로 인해 사라져가는 인간성, 즉 사랑이나 평화가 모두 없어졌다는 하소연입니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와 같은 시어들은 개발과 산업화에 의해 파괴된 인간의 상실감을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시는 성북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연일 발파하는 폭음 소리가 들렸고 조용했던 산속에 평화롭게 살고 있던 비둘기들이 거처를 잃고 이리저리 쫓기는 모습이 마치 병으로 인해 생의 마지막 구간을 힘겹게 달려가고 있는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한 시로도 읽을 수 있는 시입니다. 존재의 비애, 삶의 허망함, 그리고 스러져 가는 자신의 육신 등, 시인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을 빗대어 노래한 시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60년대 후반이 성북동이 개발되었다면, 70년대 중후반부터는 상계동 일대가 개발되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재학 중일 때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권의 시위가 연일 벌어졌는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와 더불어 ‘상계동 철거민을 위한 집회’와 당시 도시 곳곳이 재개발되면서 쫓겨나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대학생들이 각종 도시 빈민 운동에 매진했던 기억이 납니다. 재개발로 인해 재화는 넘쳐나고 풍요로워졌지만 삶은 정작 더 빈곤해지고 점점 소외되었다고나 할까요.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이런 산업화와 현대화로 인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서로 그 당시 많이 읽혔던 책이 사회심리학자였던 데이비드 리즈만이 쓴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50년대 미국 현대 사회를 명쾌하게 분석했던 그의 책은 번역되어 70년대 중후반에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풍요로운 산업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고독감과 소외감을 ‘군중 속의 고독(the lonely crowd)’이라고 표현했던 그의 표현은 그 이후 ‘잘 아는 타인(familiar stranger)’이라는 표현과 함께 지식인들 사이에서 풍미했던 개념들입니다. 아침 출근길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서 매일 만나기 때문에 익숙하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일 뿐인 현대인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너무나도 적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의 후기 시편 중 하나로, 당시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환기 화백이 오랜 친구였던 김광섭 시인의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그렸다는 점점화(點點畵),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탄생시킨 일화가 있는 시를 한 편 더 읽어보겠습니다. 김환기 화백의 이 작품은 1970년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 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의 영예를 수상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생활하던 한 화가가 그의 시 속에 있는 한 구절에 필이 꽂혀 고향과 친구, 그리고 삶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낸 작품이 대상을 받았으니, 시인과 화가를 동시에 유명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이 시는 80년대, 가수 유심초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큰 사랑을 받기도 했던 시입니다.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시집 <겨울날>(창작과비평사, 1975)
가난과 고독 속에서 지쳐 있던 김환기 화백이, 긴 투병 생활 끝에 놀라운 기적으로 일어난 오랜 친구 김광섭이 펴낸 시집을 읽다가 바로 이 시를 읽은 후,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순간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감과 패배감으로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고 여기며 심한 우울감으로 지내던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점, 선, 면에 무수한 점을 찍어 내는 점점화를 그리게 되었고, 그 길의 끝에서 그는 저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찬란하게 빛나는 큰 별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 석전(碩田)
유심초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https://www.youtube.com/watch?v=7tOaxx58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