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의 회유 / 초록을 말하다 - 조용미
연두의 회유
- 조용미
당신과 함께 연두를 편애하고 해석하고 평정하고 회유하고 연민하는 봄이다
물에 비친 왕버들 새순의 연둣빛과 가지를 드리운 새초록의 찰나
당신은 연두의 반란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찬란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유혹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확장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경제라 하고 나는 연두의 해법이라 했다
여러 봄을 통과하며 내가 천천히 쓰다듬었던 서러운 빛들은 옅어지고 깊어지고 어른어른 흩어졌는데
내가 아는 연두의 습관
연두의 경계
연두의 찬란을 목도한 순간, 연두는 물이라는 목책을 둘렀다
저수지는 연두의 결계지였구나 당신과 함께 초록을 논하는 이생이 당신과 나의 전생이 아닌지도 모른다
- <현대시>(2018년 5월호)
- 시집 <당신의 아름다움>(문학과지성사, 2020)
* 감상 : 조용미 시인.
1962년 11월 17일, 경북 고령군 다산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1990년 <한길 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 등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03년 국제협력단 자원봉사단원으로 베트남 하노이 국립외국어대 한국어 강사, 2007년 서울대 언어교육원 한국어교육센터 등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실천문학사, 1996),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 오르다>(창작과 비평사, 2000),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문학과지성사, 2004),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 2007), <기억의 행성>(문학과 지성사, 2011),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당신의 아름다움>(문학과지성사, 2020) 등이 있습니다. 2005년 김달진문학상, 2012년 김준성문학상, 2020년 고산문학대상, 2021년 동리목월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바로 이 계절에 감상하기에 딱 맞는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주말, 온 가족이 교외로 나가 식사하고 인근에 있는 호수의 둘레길을 잠시 걸었습니다. 그런데 호숫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서 돋아나는 가녀린 잎새의 색깔이 보이기 시작했더군요. 말로는 표현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보일 듯 말 듯 ‘연초록 그 자체’였는데, 시인은 이것을 ‘새초록의 찰나’라고 재미나게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바라보는 ‘당신’과 함께 경쟁하듯이 그 아름다운 연초록 색깔을 표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그런 멋진 시입니다.
‘당신은 연두의 반란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찬란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유혹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확장이라 했다 / 당신은 연두의 경제라 하고 나는 연두의 해법이라 했다’
‘연두의 반란’, ‘연두의 유혹’, ‘연두의 경제’가 나와 함께 연두를 편애하며 바라보는 사랑하는 사람의 표현이었다면, 시인 자신의 표현은 ‘연두의 찬란’, ‘연두의 확장’, ‘연두의 해법’이라고 했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수필가 이양하가 ‘신록 예찬’에서 이맘때쯤의 연초록을 예찬하며 노래한 표현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전략) 그러기에, 초록(草綠)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고 새 움과 어린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한다면, 삼복염천(三伏炎天)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取捨)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 -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淡綠)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 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 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素朴)하고 겸허(謙虛)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할 것이다.(후략)’
수필이지만 마치 시(詩)처럼 이양하의 글은 초록 중에서도, 막 잎새 한두 장을 뾰족하게 드러내는 이맘때의 연초록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노래하고 있다면, 이 시의 시인은 ‘새초록의 찰나’라고 표현하면서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시어로 동원하여, 마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수련하는 ‘수도자’의 그것에 비유했다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결계지(結界地), 원래 이 단어는 불교에서 사용되는 말로, ‘절에서 승려와 속인과의 자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목책을 둘러 일정한 행동의 제약을 두는 곳’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저수지의 물의 목책에 둘러싸여 ‘새초록의 찰나’인 마법의 연두를 연출하고 있는 왕버들이 바로 그 저수지를 결계지로 삼고 맹렬 정진을 하고 있다면서 시적 은유를 확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러운 빛이 옅어지고 깊어지는 연두를 논하는 당신과 내가 지금 맞고 있는 이 봄은 어쩌면 우리들이 전생에서 경험했던 봄풍경의 재현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뜬다고나 할까요.
‘자신의 내면(內面)을 들여다보면서 아름다움보다는 괴로움의 의미를 성찰하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용미 시인에게, 이맘때의 초록은 아마도 특별한 인연이 있음에 분명합니다. 시인의 기억 층서표(層序表)에 간직된 초록 색깔에 대한 이력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엿볼 수 있는 시 한 편을 더 감상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잘 알듯이 ‘층서표’란 지구의 지각을 이루고 있는 지층을 생긴 순서에 따라 시대별로 분류해 놓은 표인데, 시인에게 ‘초록’은 한 가지 색깔이 아니라 ‘여러 봄을 통과하며’ 그녀가 맛보고 겪었던 층층이 쌓인 ‘통증’의 기억이라니 심상치 않습니다.
초록을 말하다
- 조용미
초록이 검은색과 본질적으로 같은 색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언제였을까
검은색의 유현함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검은색 지명을 찾아 떠돌았던 한때 초록은
그저 내게 밝음 쪽으로 기울어진 어스름이거나 환희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는데
한 그루 나무가 일구어내는 그림자와 빛의 동선과 보름 주기로 달라지는 나뭇잎의 섬세한 음영을 통해
초록에 천착하게 된 것은 검은색의 탐구 뒤에 온, 어쩌면 검은색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방
그 방에서 초록 물이 들지 않고도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던 건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
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고 탐구가 게을러지면 다시 아팠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는,
결국은 더 갈데없는 미세한 초록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초록은 문이 너무 많아 그 사각의 틀 안으로 거듭 들어가기 위해선 때로
눈을 감고 색의 채도나 명도가 아닌 초록의 극세한 소리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
흑이 내게 초록을 보냈던 것이라면 초록은 또 어떤 색으로 들어가는 문을 살며시 열어줄 건지
늦은 사랑의 깨달음 같은, 폭우와 초록과 검은색의 뒤엉킴이 한꺼번에 찾아드는 우기의 이른 아침
몸의 어느 수장고에 보관해두어야 할까
내가 맛보았던 초록의 모든 화학적 침적을, 오랜 시간 통증과 함께 작성했던 초록의 층서표들을
- 시집 <기억의 행성>(문학과 지성사, 2011)
불과 2, 3일이면 지나가 버리는 연초록, 새초록을 조우(遭遇)하며 이 봄을 열심히 탐구해 보려고 오늘은 강화를 다녀오는 계획을 미리 해 두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황망히 먼 길을 떠나신 분을 조문해야 하는 일정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나들이 일정이 급하게 되었지만, 연두와 초록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돌아오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