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꽃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1969)
시집 <김춘수 시집>(지식산업사, 1983)
시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답게, 2000)
* 감상 : 김춘수 시인.
1922년 11월,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2004년 11월 8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1935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공립제일고등 보통학교(현재 경기중)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경기중학교 5학년 때 자퇴하고, 일본대학 예술학부 창작과에서 공부하였으나 1942년 일본의 가와사키시 부두에서 일본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방하였다는 불경죄로 경찰서에 유치되면서 퇴학당하고 서울로 송치되었습니다.
1945년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문화 운동을 주도했고, 1946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부임 1948년까지 근무하였으며, 1949년 마산중학교로 옮겨 1951년까지 근무하였습니다. 1960년 마산에 있는 해인 대학(현재 경남대학교)에서 조교수, 1961년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자리를 옮겨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79년에는 다시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로 옮긴 후 1981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과대학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946년에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대구에서 발행되던 동인지 <죽순>에 시 ‘온실’ 외 1편을 발표했으며, 19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행문사, 1948)를 문단에 선보인 이후 <늪>(문예사, 1950), <기(旗)>(문예사, 1951), <인인(隣人)>(문예사, 1953), <꽃의 소묘>(백자사, 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춘조사, 1959), <타령조의 기타>(문화출판사, 1969), <처용>, <남천>(근역서재, 1977), <비에 젖은 달>(근역서재, 1980) 등 다수의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꽃’은 교과서에 실려 국민적 ‘애송시’로 널리 알려졌으며, 한 방송사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작품 활동뿐 아니라 평론가로도 활동했으며, 오늘날 한국 현대 시의 지평을 넓힌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춘수 시인에게는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기간도 있었는데, 1981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대 전국구(현재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고, 1986년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을 1988년까지 맡는 등 제5공화국 신군부에 협조했던 행위입니다. 인간의 실존과 존재를 노래했던 서정시인으로서 실망스러운 행보였으나 시인 본인은 이 시기를 두고 ‘한 마디로 100%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처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 세월’이라고 회고하면서 사과했습니다.
요즘 흥미 있게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자화상 내 마음을 그리다>(한길사, 2024)라는 제목의 책인데, 지난 월요일인 ‘3월 4일’로 초판 날짜가 찍힌,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미술과 심리학, 또 예술학을 전공하고 임상 미술치료사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유명한 화가들의 자화상 104점을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상담학적인 관점으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특징은 자화상을 매개체로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고 진실한 자기와 만남으로써 ‘자기 발견’을 통한 성장을 해 나갈 수 있도록 글을 써내려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가 마르크 샤갈의 자화상을 3개씩이나 소개하면서 ‘그가 초기에 그렸던 자화상과는 비교가 될 정도로 세 번째 자화상은 생동감과 의욕이 넘친다’는 표현을 읽을 때, 갑자기 샤갈의 생동감 넘치는 ‘나와 마을’ 그림을 보고 시를 썼다는 김춘수 시인의 이 시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도 이 시의 첫 문장에 등장하는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는 유명한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3월 첫날과 어제오늘, 꽃샘추위에 샤갈의 마을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남부 지방과 강원도 산간 등, 이미 봄이 왔는데도 하얗게 3월의 눈이 내린 탓이기도 했을 것이고요.
샤갈의 그림에는 눈 내리는 풍경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아 썼다는 이 시 때문에 마치 샤갈이 눈 내리는 마을 풍경을 그렸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김춘수 시인의 시가 그려내는 상상의 이미지가 강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샤갈’이라는 이국적인 이름, 그리고 3월에 내리는 경이로운 눈 오는 모습, 또 온통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마을의 굴뚝이며 지붕이며 겨울 열매들, 또 그것이 올리브 빛으로 변해가는 정겨운 마을 풍경 이미지를 통해서 생동감 넘치는 봄의 활력을 노래한 것이, 바로 이 시의 특징이라는 말입니다. 혹한의 겨울 끝에 생각보다 더디 오는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활력 넘치는 생명력과 역동성, 생동감이 넘치는 많은 봄의 이미지를 통해서 새봄을 기다리는 간절함을 너무도 잘 표현한 시라고나 할까요.
시인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밤에 아낙들은 /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 아궁이에 지핀다’고 표현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봄이 이미 왔는데도 꽃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눈이 펑펑 내리는 생경한 상황을 그저 실망만 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궁이에 가장 아름다운 불을 지펴 봄이 하루라도 더 빨리 오게 하겠다는 정성과 노력, 간절함을 표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쯤에서 그의 대표 시이면서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 ‘꽃’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곧 곳곳에서 흐드러지게 필 올해의 봄꽃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실감 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1952)
시집 <꽃의 소묘>(백자사, 1959)
이 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가장 오해되는 시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은 이름이 주어져야 비로소 자신의 실존적 가치가 정립되고, 꽃으로 비유되는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로서, ‘너와 나’가 서로 깊은 유대 관계가 필요한 존재’임을 노래하려던 시인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사람들은 단순한 ‘연애시(戀愛詩)’로 생각해서 열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8월, 경산에 있는 대구한의대학교에 회의차 내려갔다가 지나가는 길에 아파트와 타운 하우스 이름을 ‘샤갈의 마을’이라고 이름 지은 것을 보고 ‘참 특이하게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샤갈처럼 뛰어난 화가들이 살고 있는 동네인지, 아니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처럼 눈이 펑펑 내리는 이국적인 이미지가 가득한 마을을 꿈꾸면서 지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뜻 보기엔 뭔가 있어 보이고 고상해 보였다면 저의 편견일까요. 이름이 어떻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미지가 달라지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비록 3월에도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처럼 또 눈이 내릴 수 있겠지만, 꽃 피는 봄은 어김없이 올 것입니다. 그 봄을 위해서, 그리고 그 속에 만발할 꽃을 위해서 올해 내게 주어진 가장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고 싶습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노래한 시인처럼 말입니다. - 석전(碩田)